아버지는 줄곧 거기에 있었다. 벽지를 바르고, 묘목을 심을 땅을 파고, 지붕 장식에 윤을 내고, 톱밥 냄새와 땀 냄새, 독특한 향수 냄새를 풍기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그때의 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아이처럼 마음 한구석이 늘 아팠다.
--- p.29, 「1장 먼 옛날의 아버지, 고대의 장인」
아버지의 죽음은 모든 의미에서 퀴어(queer)한 사건이었다. 우선 기이했다. 평범함을 벗어난 죽음이었다. 미심쩍은 구석도 있었다. 어쩌면 자작극일 수 있다.
--- p.63, 「3장 오랜 참사」
시내의 어느 간이 식당에서 우리는 불온한 광경을 봤다. 그 전엔 몰랐다. 세상에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머리한 여자들이 있다는 걸. 하지만 외국 나간 여행자가 고국 사람과 우연히 마주치면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서소를 한눈에 알아보지 않는가. 나도 똑같았다. 그를 알아보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버지 역시 바로 알아차리셨다. “네가 원하는 모습이 저런 거냐?”
--- p.123~124, 「4장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어느 저녁 식사 시간에 아버지는 손님과 토론을 벌이다가 거의 주먹다짐을 할 뻔한 적이 있다. 어떤 자수에 쓰인 천 색깔이 심홍색이냐, 자홍색이냐 하는 말다툼으로 말이다. 하지만 연어색에서 카나리아색, 미드나잇 블루색으로 물들며 무한한 색의 향연을 선보이는 저녁놀을 지켜볼 때에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156, 「5장 죽음의 카나리아색 마차」
부정의, 성적 수치심과 두려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역사. 실상은 아버지의 이야기도 이러한 비극적 서사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가 동성애 혐오로 희생당한 피해자라 주장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다 보면 다른 문제들에 부닥친다. 우선 내가 아버지를 비난하는 게 어려워진다.
--- p.202, 「7장 안티 히어로의 여정」
한평생 자신의 ‘성적 진실’을 숨기며 살다 보면 체념과 포기가 켜켜이 쌓이는지도 모르겠다. 성적 수치심이란 본질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다.
--- p.234, 「7장 안티 히어로의 여정」
조이스는 편지에서 잡지 〈리틀 리뷰〉에 〈율리시스〉 일부를 게재했다는 죄로 기소된 마거릿 앤더슨과 제인 히프의 일을 언급하고 있다. 덧붙여 위험을 무릅쓰며 아무도 손대려 하지 않았던 원고를 출판한 실비아 비치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들 세 여성과 더불어 〈율리시스〉의 프랑스 판본을 출판한 실비아의 연인 아드리엔느 모니에까지 모두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레즈비언이었기에 〈율리시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나 싶다. 그들은 성적 진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 p.235, 「7장 안티 히어로의 여정」
그렇다. 그는 끝내 바다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입장이 묘하게 뒤바뀌고 더러는 얽히고설킨 우리의 이야기 안에서 아버지는 내가 뛰어들 때 나를 잡아 주려고 그곳에 있었다.
--- p.238, 「7장 안티 히어로의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