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이거 자살 아니잖아요.
엉금엉금 기어 온 철용이 정근의 바지 자락을 붙잡았다. 정근은 문득 그를 걷어차고 싶었다. 냅다 걷어차인 그가 마룻바닥에 나뒹굴면, 그 몸뚱이에 올라타 앉아서 천천히 뺨을 때려 주고 싶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양 뺨을 차례로 쳐 주고 싶었다. 야, 이 새끼야, 너 이 새끼, 네가 나보다 더 힘들어? 어디서 유세를 떨고 지랄이야? 이 어린놈의 새끼가, 야, 정근은 입술을 깨물었다. --- p.20
정근은 실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그 상황을 견뎠다. 유나가 죽었다. 유나의 친구들이었다. 지숙도 그렇고 그들도 그렇고, 나보다 유나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나는 모른다. 나는 자격이 없다. 나는 유나에 관해 자격이 없다. --- p.21~22
-단 한 번도 뒷좌석에 앉은 적이 없어, 그 애는.
(……) 영훈은 혜진에게, 유나와 자기 사이에 어느새 만들어진 규칙을 설명했다. 어차피 뒤에 안 탈 걸 알면서도, 유나야 뒤에 타라, 말하고, 유나는 앞이 더 좋아요, 대답하며 조수석에 타는 것이다. 대령이 보는 앞에서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올랐다 조수석으로 바꿔 타던 일화를 이야기할 때 혜진은 가슴 아파했다. 너무 조숙한 거 아냐, 불쌍하게. --- p.139~140
얄궂게도 영훈과 헤어지며 돌아오는 길에 자꾸 윤 대령 생각이 났다. 윤 대령을 생각하면 비정하게 쏘아붙이던 유나가 동시에 생각나고, 자신을 쫓아낸 군과 지숙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아 참담해진다. (……) 유나가 죽고 나니 모든 게 복잡해졌다. 정근은 유나가 살아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지 이제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빠, 아직도 몰라요? 아빠가 잘못한 거예요. 윤 대령 아저씨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요.
--- p.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