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일곱, 서른 셋 그녀에게 공감하다
--- 정현경 (pencil@yes24.com)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에 대한 기사를 하나 먼저 읽었드랬다. 대학시절부터 신방과라는 전공 탓인지 매일 빼놓지 않고 읽었던 신문을 취직한 지 한달만에 끊고 이제는 거의 신문과 담 쌓고 살고 있지만, 그래도 꼭 챙겨보는 중앙일보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 기사였다. 기사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설은, 제목과 달리 '쿨하지' 않다." 라고. 그래서 나는 『쿨하게 한 걸음』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 어떤 'so cooooool~'에 대한 기대를 깨끗이 접어 버리고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정도면, '쿨하게 행진', '쿨하게 전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쿨하게 한걸음' 정도로는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공 연수의 객관적인 상황만을 따져본다면, 대체 이 소설 어느 대목에서 '쿨함'을 찾을 수 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서른 셋의 나이에 심드렁하던, 하지만 조금만 참고 잘 버텼(?)다면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을 지도 몰랐을 연애를 끝내버렸고, 그렇다고 실연의 상처로 괴로워하지도 않았으며, 회사에서 구조조정 바람이 불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먼저 사표를 내버린다. 직업도, 남자친구도 없는 서른 셋의 여자 주인공이 선택하는 것은 바로 '공부'다. 그것도 심지어 행시도, 사시도, 임용고시나 언시도 아닌, 뚜렷한 목표 없는 공부다. 그저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는지 기억을 더듬어가며, 도서관에서 마음이 가는 분야의 책들을 열심히 섭렵하는 정도다.
나 역시 책을 읽기 전에 이 객관적 상황만을 보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 우울하군.' 그리고 책을 읽어가던 중반쯤에는 '『달콤한 나의 도시』의 현실 버전, 혹은 우울 버전' 정도의 느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덮은 지금은 오히려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물론 연수 주위의 인물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마치 내 주위의 일상을 끌어다 놓은 것 같다. 일 안하고 쉬는게 소원이라더니 정년 퇴직 후에 더 열심히 일자리를 찾는 아버지, 갱년기 때문에 우울해하고 '누구 자식은 어떻다더라'를 입에 달고 사시는 어머니, 회사를 때려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와 실컷 자유연애를 즐기다가 조건 맞는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 모두 지금 내 주위의 '아무개의 모습이네'하고 끼워맞출 수도 있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하지만 주인공 연수는?
어떻게 보면 주위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연수, 그녀만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쿨하기는 커녕 구질구질해 보인다. 나의 서른셋이 저런 모습일까봐 걱정되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녀는 충분히 쿨해 보인다. 이놈의 회사 때려치네 마네 하면서 책상 두번째 서랍에 사표를 넣어두고도 뾰족한 대안 없이는 회사를 때려치지 못하는 것이, 이 남자가 정말 내 인생의 반려라는 확신이나 설레임 따위 없어도 이 나이에 어떻게 또 새로운 남자를 만나겠어, 혹은 내가 이만한 조건의 남자를 또 만날 수 있겠어, 하면서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기보다는 결혼하는 쪽으로 마음을 잡는 것이, 바로 진짜 현실 속의 서른셋 여자들 아닌가.
그러니까 이 책의 주인공 연수는, 그 모든 편한 길을 뿌리치고 쿨하게 한걸음을 내딛었다. 비록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전진이 아닌 후진으로 보일지라도, 남들 다 앞만을 향해 정신없이 걸어갈 때 쿨하게 한걸음 뒷걸음질 치는 것도 뭐 그리 나쁘지 않잖아? 이거야말로 진짜 쿨한 거 아닐까? 뭐 그런 생각.
물론 쿨하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이 대단히 훌륭하다거나 나도 그러고 싶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냥, 이 시대의 우리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겠구나. 언젠가, 나도 이런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그래'라고 말해주는 든든한 친구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