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편지에 드러난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것임을 본다. 앞으로 논의되겠지만, 자기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배타적으로 다른 민족을 정복하거나 미워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복이 되도록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다.…사도 바울은 뼛속 깊이 유대인이었다. 그는 비록 이스라엘 땅이 아닌 곳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영향과 말씀을 통해 민족의 역사를 공부하며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정체성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려고 하신 선교가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이 갖고 있던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와 행동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그에게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가져왔지만, 그는 소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세상의 구원을 정점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소망으로 살았다.
---「“1부. 정체성(유대인)”」중에서
예수의 삶, 죽음, 부활은 바울에게 신적인 혜택beneficence의 핵심적인 포인트였다. 제임스 던James Dunn이 주장했던 것처럼, 은혜는 하나의 사건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좋으심이라는 밋밋한 명제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나 다른 물질적인 복을 통해 주시는 좋으심 정도가 아니라 아들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 바울에게는 선물the Gift이다. 바울은 이 선물을 부조화적인 선물로 경험하고 해석한다. 그래서 이방인 선교가 성립된다. 그들은 택함받지 않은, 즉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던 자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그들도 은혜에 의해 부름받고 성령의 선물을 값없이 받게 된 것이다. 바울의 고백은 자신의 경험이 이 자격을 무시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으로서의 특권 때문에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은혜로만 부름받았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이 교회를 핍박했음에도 은혜 안에서 부름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전에 당연하게 여겨졌던 인종, 지위, 지식, 도덕성, 또는 성별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2부. 복음(은혜)”」중에서
바울이 인용하거나 요약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은 엄밀히 말해 인간이 구원받는 시스템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인간은 구원받는다. 그 복음이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바울이 생각했던 복음은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서술적인 선포다. 왕이신 예수님의 탄생과 삶, 가르침과 사역,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틀어 공포하는 것이다. 그 공포는 듣는 사람들에게 그분을 믿고 순종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믿음의 순종”, 롬 1:5). 복음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하나님과 세상의 이야기다. 바울은 하나님과 세상의 이야기가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 안에서 집중되고 요약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 이야기가 모든 세상 사람을 위한 “복음”, 좋은 소식이었다. 바울의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셔서, 이스라엘의 왕(메시아)으로 나타나셨으며, 온 세계의 주님으로 확정되셨다고 선포한다. 더 간략하게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온 세계의 주님이라고 선포한다.
---「“2부. 복음(복음)”」중에서
바울은 말과 글 모두 뛰어난 사람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커뮤니케이터 중 하나다. 기독교 신학이 그가 쓴 편지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다. 그의 편지들에 나와 있는 대로 극심한 반대와 공격이 있었지만, 그 편지들은 결국 공동체를 자라게 했고, 그들의 마음을 바꾸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고, 그의 사상은 초기 기독교를 형성하고 2천 년 동안 형성된 교회의 기반을 다졌다. 그의 설득으로 인해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고, 그 문화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그가 고린도 사람들이 기대한 화려한 언변으로 설득하려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오히려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그리스도의 약함에 기반을 둔 그의 사상이 설득력 있는 수사학에 둘러싸여enclosed 주어졌을 때 놀라운 결과가 생긴 것이다. 그는 “그럴 듯한 말과 아첨하는 말”(롬 16:18)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가 있는 “말”로 전한 것이다. 진정한 설득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3부. 문화(말)”」중에서
바울이 가르쳤던 윤리/도덕은 율법에서 제시하는 선과 악의 기준을 기반으로 그리스도에 비추어 발전시킨,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바울이 그의 공동체에 속했던 사람들이 갖기 원했던 모습은 구약의 윤리/도덕적 기준에 맞는 것이었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 훨씬 더 깊은 변화를 원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정신”에 맞는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고, 그의 편지들은 그것을 형성하려는 시도였다.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밝혀서 그것을 따르게 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변화를 원했던 것이다. 바울의 공동체 비전은 변화된 공동체가 변화된 개인을 생산해 낸다는 것이었지, 변화된 개인들이 모여 변화된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3부. 문화(공동체)”」중에서
바울이 생각했던 “믿음”의 근원과 영향은 간단히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변화시킨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하게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 받는 것을 포함한 더 큰 그림이다. 그러므로 그 믿음을 우리 안에서 생긴 지성적인 활동으로 간주할 수 없다. 또한 죄에 사로잡힌 인간 안에서 생산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믿음은 원래 우리 것이 아니며,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상태일 때 뜻밖에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믿음에 대해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으며, 그 은혜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감사드릴 수밖에 없고 나의 신실함으로 보답할 수밖에 없다.
---「“4부. 비전(믿음)”」중에서
아마도 바울 신학의 주제 중에서 약함의 신학이 가장 오해받는 부분일 것이다.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를 세상적인 기준에서 약하던 자가 강해지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해하면, 우리가 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해질 때 하나님이 그분의 능력을 우리 안에 부어 주셔서 우리를 강하게 해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이 그의 삶과 사역에서 경험했던 것은 그의 약함을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채우셔서 바울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그가 강해진 것이 아니다. 그는 약하게 남아 있었고, 그의 힘든 것도, 그의 질병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계속 자신의 약함을 안고 사역했으며, 질그릇이 갑자기 금그릇으로 변하는 경험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질그릇으로 계속 남아 있었지만, 그 안에 있는 보배가 심히 큰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역사한 것이다. 그래서 그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었지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4부. 비전(약함)”」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