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생적 한계와 고난의 세월을 경험하지 않은 영웅의 이름을 역사는 기록하지 않는다."
그리스 로마 영웅들의 흥미진진한 삶과 보석처럼 빛나는 지혜 미궁의 정복자 테세우스, 세계의 지배자 알렉산드로스, 소크라테스가 사랑한 남자 알키비아데스, 윤회설을 믿은 채식주의자 퓌타고라스, '개 같은 인생'을 노래한 디오게네스, 서민을 위한 개혁가 그라쿠스 형제, 포에니 전쟁의 두 영웅 스키피오와 한니발,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를 살다간 영웅들의 이름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인용되고는 한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교양인 이윤기의 마지막 목소리는 그 영웅들의 삶을 되살피는 작업을 통해 유구한 역사를 관통해 온 인류의 지혜를 전한다. 테세우스를 구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에서 술술 풀려 나오는 실처럼, 저자의 손에서 술술 풀려 나온 영웅들의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현대인의 삶과 세계를 반영하며 여전히 유효한 삶의 지혜를 전해 준다. 서구 문화의 초석을 이루는 헬레니즘을 다루면서도 저자는 한국인의 정서와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솜씨 좋게 풀어냄으로써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영웅은 자기보다 큰 것에 자신을 바침으로써 한 시대의 주인공이 된 사람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영웅의 삶은 한 귀퉁이가 모자란 채로 태어난 사람에게 시작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태생적 한계가 영웅의 필요 조건인 것은 아님에도 태생적 한계와 고난의 세월을 경험하지 않은 영웅의 이름을 고대의 신화는 별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 본문 중에서
편모슬하에서 자란 테세우스와 그라쿠스 형제, 유난히 뾰족한 뒤통수를 늘 감추고 다녔던 페리클레스, 눈병으로 한쪽 시력을 잃은 한니발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에게도 감추고 싶은 비밀과 약점이 있었다. 전지전능한 신과는 달리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태어나 그 약점을 끌어안은채 살아갔던 영웅들의 삶을 통해 저자는 인생의 풍랑 앞에 좌절하는 현대인들에게 격려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 "수사법은 고함보다 큰 울림을 자아낸다."
오늘날 우리의 언어 속에 살아 숨 쉬는 영웅들의 촌철살인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이윤기는 창작에 버금갈 정도의 깊이를 갖춘 품격 높은 번역으로 우리 번역 문학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번역가로 평가된다. 번역가로서 오랜 기간 활동하면서 언어의 적확한 의미에 대해 깊이 천착해 온 작가답게 그가 구사하는 문체와 어휘는 매우 독창적이고 한국적이다. 간결하고 재기 넘치는 촌철살인, 자연스럽고 우아한 수사법을 즐긴 영웅들처럼 저자도 말과 글을 다듬고 꾸미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수사법을 동원한 논증의 기술은 때로는 진실을 가리기도 하고 때로는 한시적 진실을 영원한 진실이게도 하며, 시끄러운 고함보다 큰 울림을 자아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저자가 '들어가는 말'에 밝혔듯 이 책은 "다양한 경로로 우리의 언어에 삼투해 들어와 있는 서양 문화의 무수한 표현법과 수사법을 조명하고 여기에다 피를 통하게 하고 싶다는 희망"에서 나왔다. 돈 잘 버는 사람을 뜻하는 '미다스의 손', 풀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의 대명사 '고르디오스의 매듭',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하는 말 '주사위는 던져졌다.' 등 이 책이 여행하는 시공간에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오늘날 서양 문화의 단골이 된 유행어들이 살아 날뛴다. 근 2000년 전의 영웅들의 삶을 다시 읽는 이유는 그러므로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사람이 지치면 고향 땅을 찾듯이, 헬레니즘 문화는 우리의 문화가 곤고해질 때마다 돌아보
게 되는 인류의 유산이자 지혜의 보고인 것이다. 나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영웅들의 본색을 되살피는 작업을 통하여, 다양한 경로로 우리의 언어에 삼투해 들어와 있는 서양 문화의 무수한 표현법과 수사법을 조명하고 여기에다 피를 통하게 하고 싶다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 희망이 우리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작업이 될지언정 때를 묻히는 작업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옷깃을 여민다. 서양 문화를 향해 여미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를 향해 여민다. --- 이윤기, 「들어가는 말」 중에서
◆ 헬레니즘 문화를 꿰뚫는 이윤기의 지적 여정이 도달한 종착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의 바탕은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신문에 연재되었던 글이다. 이에 덧붙여 저자는 10여 년 동안, 지면의 한계 때문에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새로 보충했다. "서양의 역사학자나 신화학자도 아닌 한국의 문학도, 신화학도로서"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 이야기를 다시 쓰려 했던 그의 원대한 계획은 그렇게 10여 년 뢸에 실현되었다. 이 책을 출간하기 위해 저자는 1999년부터 2001년 사이에 그리스와 터키, 로마 등지를 샅샅이 돌아보고 왔고, 그러면서 '읽는 책'이 아닌 '보는 책'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시각적 자료를 확보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젊은 시절 오로지 글을 통해서만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접한 저자가 자신이 그 지역들을 직접 답사하면서 느꼈을 황홀한 개안의 체험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으리라 짐작된다. 유고 곳곳에서 저자가 추가해 넣으려 했던 사진에 관한 메모들이 발견되었는데, 부족하나마 시각적 보조자료를 활용해 독자들에게 낯선 세계에 대한 상상력의 폭을 넓혀 주고자 했던 저자의 간절한 바람이 아니었을까. 2010년 8월 27일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저자가 채 끝맺지 못한 '나오는 말'은 저자의 딸인 번역가 이다희 씨가 마무리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은 이윤기의 이름을 달고 새로 출간되는 마지막 책 가운데 하나가 될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그리스 로마 영웅들이 살던 시대는 헬레니즘의 신화시대에서, 헤브라이즘의 가장 중요한 사건, 즉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일대의 사건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는 이 영웅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헬레니즘에서 헤브라이즘으로 가는 아버지 개인의 여정을 이어 주는 다리 같은 것이었다. 비록 헤브라이즘까지 미치지 못했지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은 헬레니즘 문화를 꿰뚫는 이윤기의 여정이 도달한 종착지로서는 꽤나 적절한 것 같다. 나는 독자이기에 앞서 딸로서, 아버지의 여행에 길동무가 되어 준 독자 여러분께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드린다.
--- 이다희, 「나오는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