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는 인간이 지닌 5가지 감각 중에 가장 중요한 감각은 시각과 청각이라고 하며, 이 두 감각에 기초해서 인간의 언어를 몸짓(동작)과 음성언어로 나눈다. 즉 인간은 몸짓이나 음성언어로 소통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소통 방식은 의지하는 감각에 따라 방법과 내용에 차이가 있다. 시각에 기초한 몸짓의 소통 방법은 ‘보여주기’이고, 청각에 기초한 음성언어의 소통 방법은 ‘말하기’다. 몸짓을 사용해서 소통하는 예로서, 배가 고플 때 먹는 시늉을 하고 목이 마를 때 마시는 시늉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는 원하는 바를 몸짓으로 보여줌으로써 소통한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생존에 필요한, 원초적인 최초의 욕구다. 루소는 몸짓의 방식은 이런 종류의 욕구를 전달하기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몸짓에 의한 소통은 인간적이기보다는 동물적이고, 문화적이기보다는 자연적이다. 반대로 음성언어는 정념을 전달하기에 적합하다. 루소는 인간에게서 최초의 몸짓을 출현시킨 것은 자연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생존 욕구였으며, 최초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게 만든 것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정념이었다고 말한다.
---「11~12쪽, 필요의 말, 정념의 말, 논리의 말」중에서
이제 말과 언어에 얽힌 아기의 작은 역사를 생각해보자. 임신 소식을 듣고 기쁜 부부는 출산을 기다리면서 아기에게 태명을 준다. 부부는 아기가 별 탈 없이 세상에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또한 그들에게 아기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태명을 지을 것이다. 남이 지어주는 별명처럼 태명은 부부가 아기를 부르고 아기와 대화하기 위한 이름이다. 아기는 태명과 함께 부부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열 달이 지나고 아기가 태어날 즈음 아기의 진짜 이름이 결정된다. 이제 아기는 태명 대신 고유명을 얻게 된다. 그럼으로써 아기는 인간 사회에서 한 자리를 얻는바, 아기에게 부여된 이름은 출생신고서를 넘어선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아기는 언어를 사용하는 가족과 사회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이름이 필수적이다. 이름을 갖지 못한 사람은 사회 바깥에서 소외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죽은 사람에게도 이름을 새겨넣은 비석이 필요한 것이다. 비록 그의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갔지만 망자의 이름은 비석에 새겨져 유지된다.
---「24~25쪽, 아기에게 말은 어떻게 도래할까?」중에서
우리는 ‘나무’라는 단어가 어째서 실제의 나무를 지시하게 되었는지,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대상을 미국인은 왜 ‘tree’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이 대상을 이 단어와 결합시켜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것이 언어가 지닌 자의성으로, 대상과 단어 사이에 연관성을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어가 자의성으로만 이루어졌다면 사람들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각자 던지고 있었을 것이다. 언어의 자의성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우리는 말을 하고 서로의 말을 이해한다. 이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공통의 약속이 언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의 약속은 또한 사회를 가능하게 하기도 하는바, 대화가 일어나는 곳에서 나 혼자만 오고가는 말들을 이해하지못한다면 나는 그 사회 바깥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43~44쪽, 파롤과 랑그」중에서
야콥슨에 따르면, 발화는 일정한 언어적 요소들을 선택selection하고, 그런 다음 상위의 차원에서 좀 더 복잡한 언어 단위들로 그 요소들을 조합combination하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쉽게 풀어보자면, 발화자는 단어들을 선택하고, 자신이 속한 랑그의 문법 체계에 준해서 그 단어들을 문장으로 조합해낸다. 이 문장들은 다시 더 상위 차원의 발화 형태로 조합된다.* 소쉬르는 발화 행위에 이미 존재하는 말들의 연결에 주목했지만, 야콥슨은 그러한 연결에서 부재하는 단어를 실존하게 하는 능동적 기능에 주목한다. 단어를 끄집어내는 것이 발화의 능동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바, 능동적 기능에 의해 어휘창고 단어들 가운데 어떤 것이 선택되고 그 단어들이 조합된다. 선택과 조합은 각각 코드code와 맥락context에 의거해 행해진다. 코드는 일정 단어들을 동일한 범주에 넣는 문법적 규칙을 의미하고 맥락은 발화가 일어나는 상황으로서 의미론적 측면을 의미한다. 코드는 소쉬르가 말한 집단적 언어 규칙인 랑그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야콥슨에 따르면 단어의 선택은 코드에 의해 연관된 요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단어들의 조합은 발화 내용인 메시지와 코드를 따르면서, 메시지 안에서 연결되는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94~95쪽, 말을 잃어버린 여자아이」중에서
타인이 없다면 나는 사물을 온전히 지각하지 못한다. 내게 보이지 않는 사물의 면은 영원히 내게 보이지 않을 것이지만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보지 못하는 사물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설령 내가 사물을 보지 않을 때라도 그 사물이 타인에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지각하는 사물은 과거, 그리고 미래에 잠재성의 장에 머무르는 것이다. 타인이 있음으로써 내 앞의 사물은 또 다른 가능성의 장을 내게 제시한다. 잠재성 안에 머무르던 사물은 나의 지각에, 또한 타인의 지각에 대해서 가능한 면모를 드러낸다. 들뢰즈는 사물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구분한다. 잠재성이란 존재론적으로 사물이 내포하고 있는 성질을 가리키며, 이것은 인간이 그것을 경험하건 경험하지 않건 이미 사물에 내재해 있다. 반면 가능성이란 어떤 사물을 인지하기 위해 통일된 무언가로 사물을 정립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잠재성으로서의 사물과 나와 타인의 지각들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대상으로의 변화는 내가 사물로부터 위협받지 않으면서 사물을 지각의 대상으로서 경험하도록 보장해준다. 들뢰즈는 우리가 타인의 심술을 불평할 때, 우리는 보다 끔찍한 심술, 즉 타인이 없을 경우 사물들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일 심술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19~120쪽, 무인도에 도착한 로빈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중에서
말은 몸짓이고 의미를 지향한다. 아직 표현되지 않은 의미는 언어적 몸짓에 의해 말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출현한다. 말의 사용을 사전 속 단어들을 문법에 맞게 배열하여 머릿속의 생각을 전달하는 활동으로 이해한다면, 말의 사용에 창조성이란 전혀 없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말한다는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의미를 말로 포획하고 세상에 내놓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말, 몸짓으로서의 말은 그 자체가 하나의 표현으로서 의미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예술적 활동과 공통점을 갖는다. 우리는 이 장에서 말을 그저 추상적인 기호가 아닌 그 자체로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 인간적 산물로 다룰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시와 같은 문학 작품을 이해할 때 더욱 유효하다.
---「125쪽, 살 또는 감각의 언어들」중에서
표적 영역과 원천 영역에 의한 은유의 기술에서 우리는 은유의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원천 영역이 은유의 대상인 표적 영역의 부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는 말은 표적 영역이 원천 영역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실제로 우리는 시간(표적 영역)을 돈(원천 영역)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돈은 빌려주고 갚는 것이지만 시간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만일 시간의 개념을 돈의 개념으로 환원시킨다면, 이는 시간이 지닌 풍부한 의미를 빈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은유의 두 번째 특징이 나온다. 어쨌든 은유가 표적 영역과 원천 영역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은유는 부각되는 내용과 상실되는 내용을 아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광기다”라는 은유는 사랑의 열정, 이성을 마비시키는 상태 등을 부각하지만 사랑이 가질 수 있는 다른 특징들인 함께 완성하는 것, 아름다운 것 등을 감춘다.
---「159~160쪽, 은유, 이해하는 마음과 공감의 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