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가 죽었다. 따사로운 햇살도, 잔물결이 반짝이는 호수도, 생기 넘치는 잔디도 잠시 눈앞에서 사라진다. 곧 수진의 머릿속을 채우는 건 죽음이다. 습한 냄새를 풍기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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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은 소리 나지 않게 움직였다. 납골당 입구 손잡이를 찾아 돌렸다. 예상대로 철컥, 하는 단호한 소리만이 수진을 맞이했다.
“거기 누구세요?”
순간 환한 빛이 수진의 얼굴 위로 가득 쏟아졌다. 수진은 숨죽인 비명을 작게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손전등을 비추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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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납골당 입구에서 이것도 어신님의 뜻이라며 어깨를 으쓱이던 태현에게는 어딘가 그를 낯설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럴 때면 태현은 수진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디저트 부스러기를 입가에 묻히고 미소 짓는 지금은 달랐다. 태현은 제 나이대의 평범한 학생처럼 웃었고, 건드릴 수 없는 천진함을 풍겼다. 어느 쪽의 모습이든, 그의 주변에서는 맹목적인 믿음을 소유한 사람 특유의 공기 같은 것이 흘렀다. 수진은 그게 신기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독실한 신자로 만들었을까?
--- p.52
“이제 슬슬 가줬으면 해요.”
“네?”
“납골당도 봤고, 유품 정리도 끝났고……. 이만하면 볼일은 다 끝나지 않았나? 외지인이 오래 머무르면 마을 기운이 안 좋아지거든. 마을 사람들이 눈치 주기도 하고. 여기까지 했으면 오래 있었지, 오래 있었어. 내 당장 나가라고는 안 할게. 오늘까지만 있는 걸로 합시다.”
수진은 할 말을 찾지 못해 가만히 입만 뻐끔거렸다. 친절한 듯, 무례한 듯, 이장은 보이지 않는 선을 넘지 않으면서 돌려 말하고 있었다. 당장 여길 떠나라고,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 pp.56~57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안개 속에서 기도문을 외는 이장과,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주민들과, 저 오방색 천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앞으로 나와 제사상과 오방색 천에 절을 했다. 절이 끝나자 남자들은 수풀에서 작은 나룻배를 하나 꺼내 끌고 왔다.
--- p.63
하지만 그건 분명 이모였는데. 수진은 말을 삼켰다. 물을 먹은 담요가 서서히 무거워지며 수진의 어깨와 등을 짓눌렀다. 이모가 부탁했는데, 이모가 마지막으로 부탁했는데, 나에게. 이모는 부탁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는데. (…) 물 밑에, 물 밑에 뭔가 있었는데.
--- p.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