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어 쿠퍼는 학기 중 대부분 그렇듯 그날 대단히 만족했다. 공허한 여름 두 달을 보낸 후 다시 세워진 제국에 온 마음을 다해 뛰어들었다. 공허했던 이유는, 학생들 사이에서 신으로 거닐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으로 거닐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람도 그의 전능한 권력 앞에서 부들부들 떨게 만들 수 없어서 공허했으며, 좌지우지하는 지배욕의 규범을 눈에 보이는 많은 것에 강요할 수 없어서 공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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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린 여자애의 흔한 이상조차 품은 적이 없었다. 열세 살 때 처음 키스를 허락한 남자는 간절히 기다린 그림엽서의 아도니스가 아니라, 여름 방학 때 우연히 이웃집에 묵은 서른 살 남짓의 은행원이었다. 머리카락이 성긴 그 은행원은 마침 그날 저녁 사람들이 리자를 혼자 집에 남겨둔 기회를 이용한 것뿐이었다. 그래도 당시 리자는 상대가 어른이라는 사실에 상당히 우쭐했다. 다시 도시로 돌아온 그녀는 환상적인 기대에 차서, 성적 욕망에 눈뜬 학교 친구들을 경멸하며 거절하고, 다른 사람이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것에 몹시 실망했다. 매끄러운 말과 은밀한 성적 농담을 늘어놓는 무용 강습 동료 소년들은 지루했지만, 제일 예쁜 자신이 유일하게 ‘숭배자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싫어서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지 않고 입술을 허락해 벌써 열다섯 살에 키스가 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 p.165~166
그렇다, 예전에,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르는 예전에 쿠르트는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몸을 바칠 수 있었다. 어쩌면 악의 없이 잘못 내렸을 수 있는 경고, 교수가 법정 앞에서 책임질 수 있는 정당한 학급일지 기재, 모진 말, 부당하게 준 성적…… 오, 그때 쿠르트 게르버는 일어나 마지막까지 싸우고, 주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쓰고, 주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을 자기 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일’이 그에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 p.254~255
쿠르트는 그녀를 따라간다. 무릎이 후들거리고 환호성을 지르지 않으려고 자제해야 한다. 리자가 딸깍 전등을 켠다. 이젤과 오만 가지 다른 도구들이 가득한 일종의 헛간으로, 가구라고는 소파 하나뿐이었다. 리자는 거기 앉아서 익살스럽게 진지한 태도로 야단치기 시작한다. 그가 그렇게 오래 연락하지 않고, 그렇게 예민하고, 그렇게 어린애 같고, 그렇게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그녀의 밝은 아름다움에 휩쓸려 그는 그만 더 참지 못하고-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진다. 리자가 팔을 늘어뜨린 채 눈을 뜨고 공허하게 천장을 쳐다본다. 쿠르트는 순간 멈칫하다가 바로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포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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