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스러운 국민 신화를 지어내는 일은 역사가의 책무가 아니다. 설사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일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역사는 국민적 자각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그런 자각 없이는프랑스에서든 다른 어디에서든 고유의 문화도, 진정한 문명도 있을 수 없다.
가까운 과거의 사건들만으로 현재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 사실 현재는 다양한 수준에서 훨씬 더 오래된 경험의 산물이다. 현재는 지나간 수백 년의 세월이 빚어낸 결과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진화 과정 전체’가 빚은 결과물이다. 현재가 폭넓은 과거와 연관되었다는 주장은 결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연스럽게 우리 주변 세계를 우리 자신의 짧은 경험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류의 삶에는 분명히 이런 사건들의 영화(映?)로 그려낼 수 없는 수많은 현상이 있다. 인류가 살아가는 공간, 인류를 구속하고 그 존재를 결정하는 사회 구조, 인류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복종하는 윤리적 규범들, 종교적 철학적 신념, 인류가 속한 문명 등이 그렇다. 이런 현상들은 우리의 수명보다 훨씬 더 길어서 우리가 그 완전한 변화를 목격하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과거를 연구하고 반추한다. 그리고 입수할 수 있는 문서의 고증을 통해 과거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그다음에 올 일을 미리 알고 있다. 예컨대 18세기를 연구하고 있다면 계몽주의가 초래할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그들의 지식과 이해가 크게 강화된다. 그들은 연극의 마지막 대사를 안다. 오늘날의 경우에는 결말이 다를 수 있지만 정말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연극의 마지막 대사를 상상하는 것과 같다. 모든 가능성 가운데 발생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을 구별해내는 일이다. 어렵고 위험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20세기에 문명이란 말은 단수보다 복수로서 더 두드러졌으며 우리의 개인적 경험에도 훨씬 더 근접했다. 박물관은 시간을 거슬러 우리를 과거의 문명으로 이끈다. 실제 여행은 그 점을 훨씬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영국해협이나 라인강을 건너거나, 혹은 지중해 남쪽으로 향하는 등의 여행은 뚜렷한 경험이며 기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모두가 문명의 다원성을 강조한다. 문명이 제각기 뚜렷하게 구별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느 때보다 빠른 문화의 확산은 세계사에서 한때 더없이 공고했던 문명들 사이의 경계를 없앨까? 많은 이들이 그렇게 될까 봐 염려하는가 하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문명들이 ‘현대적’ 삶의 물질적 요소들을 차용하는 데에 열광적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수용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오히려 문명들은 외부의 영향을 완강히 거부하기도 한다. 과거에 그런 것처럼, 오늘날에도 문명들은 이런 태도 덕분에 소멸의 위기에 놓인 고유성을 안전히 지킬 수 있다.
세계와 사물을 보는 관점이 시대마다 다르고, 저마다 다른 집단정신이 사회 전체의 대중을 지배하며 한 사회의 태도를 결정하고 선택을 유도하고 편견을 강화하며 사회의 움직임을 이끈다. 이는 문명에 관한 확고한 사실이다. 더구나 한 시대의 사건이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은 먼 과거, 거의 무의식적인 고대의 신념, 두려움, 분노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병균에 대한 기억은 사라졌지만, 세대를 거듭하며 전파되는 엄청난 전염병과 같다. 한 사회가 당대의 사건에 대해 보이는 반응, 사회에 가해지는 압력에 보이는 반응, 혹은 직면한 결정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며 이해관계의 문제도 아니다. 그보다는 집단 무의식에서 비롯되어 설명되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 강박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나 정말로 문명의 역사를 지배하는 이름은 일련의 에피소드를 겪어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치 일련의 폭풍우를 견디고 살아남은 배와 같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엄청난 기간을 뛰어넘어 동시에 여러 세대를 표상한다. ‘라틴’ 중세가 끝날 무렵 단테(1265-1321)가 그랬고, 유럽 최초의 근대가 끝날 무렵 괴테(1749-1832)가 그랬다. 고전 물리학의 문턱에 서 있었던 뉴턴이나 오늘날 소립자 물리학과 그 엄청난 중요성을 알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을 덧붙일 수 있다.
역사가도 처음에는 그런 구조를 잘 포착하지 못한다. 역사가들의 인습적인 연대기적 설명은 나무를 보느라 너무 분주해서 숲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층의 구조를 인지하고 추적하려면 엄청난 범위의 시간을 다루는 소모적인 일을 해야 한다. 의식적이면서 동시에 무의식적이고 영속적이거나 영속에 가까운 거대한 현상을 살필 때, 바로 전에 다루었던 표층의 움직임과 사건들, 사람들은 자취를 감춘다. 그런 거대한 현상이 문명을 이루는 ‘토대’로, 문명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구조다. 예컨대 종교적 믿음, 시간을 초월한 농민들, 또는 죽음, 일, 쾌락, 가족생활에 대한 태도가 바로 문명의 구조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에라스무스의 추종자들일지도 모르지만 불쾌한 재세례파를 익사시키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네덜란드에서도 비슷한 학살이 있었다. 역설적인 일이었다. ‘교황 지지자들’은 성삼위일체를 부정하거나 성자(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며 동시에 교회와 국가와 부자를 공격했던 불운한 사람들을 사냥하고 교수형에 처하고 도살하거나 익사시켰다. 자비롭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일정한 논리는 있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은 과연 어떤 근거에서 같은 박해를 자행할 수 있었을까?
유럽을 변호하자면, 흑인 노예제를 향한 동정과 분노의 반응은 항상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반응이 그저 형식적인 것에 그치지 않았으며 영국에서 흑인들의 해방을 위한 윌리엄 윌버포스의 운동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두 갈래의 노예무역 가운데 (아메리카로 향한) 노예무역이 (이슬람으로 향한) 노예무역보다 더 인간적이었다거나 덜 비인간적이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시점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즉 오늘날 신세계에는 활력 넘치는 아프리카 공동체가 존재한다.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강력한 민족 집단이 발전했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시아나 이슬람 땅에서는 그런 아프리카 공동체를 찾아볼 수 없다.
유럽은 언제나 혁명적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혁명적이다. 유럽 역사 전부가 그런 사실을 확증한다. 그러나 동시에 유럽은 언제나 반혁명적이었고 지금도 끝없이 반혁명적이다. 여기서 다시 중요한 것은 일련의 혁명적 순간들 자체가 아니며 그런 순간들이 미래에 끼치는 영향이다-그것을 가리켜 ‘혁명적 인문주의’라 부를 수 있다. 이런 낯선 문구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혁명의 인간적인 내용과 이상적 ‘유산’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고립되었다. 이 방대한 지역 안에서 자취를 감추거나 그 안에 매몰되어 버렸다. 도시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모국과 식민 자본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몇몇 지방은 이탈리아나 프랑스보다도 넓었다.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제 일을 꾸리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어도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과거에 그랬다. 대안은 없었다. 그래서 최우선이었던 것이 남겨졌다. 북미와 남미에서 모두 자치를 원칙으로 하는 ‘아메리카식 민주주의’는 그 넓은 공간의 결과물이었다. 공간은 모든 것을 완화하고 모든 것을 보존한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정복되기 전까지다.
남미 국가들에는 여전히 일관성을 유지하는 정당이 없다. 더욱이 엘리트, 칠레에서 메디오 펠로medio pelo(교배종을 말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로 불리는 안정적인 중간 계급은 항상 부족하다. 소수의 지식인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런 중간 계급이 출현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안정이 필수다. 빈부격차가 극심하지 않은 경제도 필요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머무는 세계에서 사회의 균형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이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미국은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있다고 믿어왔다. 과거는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기에 지난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은 새 미래를 만들고 있다고 믿어왔다. 황금률은 그 뿌리와 연결되는 것을 피하고 예기치 않은 것에 주력하는 것이다. 핵심어는 ‘기회’다. 이름을 남길 자격이 있는 사람은 기회가 오면 잡아야 하고 철저히 이용해야 한다. 거듭된 타인과의 경쟁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연구와 통계가 사실의 윤곽을 보여준다. 200개의 대기업이 미국의 엄청난 물질적 부의 절반을 차지했다. 많은 경우 그들은 법인이었고 피고용인이 소유한 기업도 있었다. 이런 복합기업의 제국에서 임금과 급여는 유럽과 비교해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윤과 연동되기보다 고정되어 있다. ‘이윤은 그렇게 기업에 속한다. 이윤은 기업을 보호하고 기업이 성장할 수 있게 해 준다’라고 헨리 포드는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예외적인 형태의 자본주의가 확립되었고 이제 반독점법이 손쓸 수 없는 ‘거인들’의 지배가 확립되었다-그런 사실은 1948년 체스터필드, 럭키 스트라이크, 카멜 담배 제조업자들에 맞서 정부가 취했던 조치들에서 볼 수 있다. 독점기업이 단 하나뿐이라면 몰라도... 자그마치 200개나 된다! 상황을 바꾸려면 급진적인 개혁이, 혁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것을 꿈꾸지 않는다. 과점 기업들은 소기업들로 분할되지 않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으로 피신한 소련 시민들의 반응을 생각해보자. 한 사회학자가 그들이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물었다. 그들은 물질적 삶이 전반적으로 나아졌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료 진료를 몹시 그리워했다. 그리고 소련에서 누렸던 모든 환자의 평등한 지위를 더더욱 그리워했다. 미국에 잠깐 머문 프랑스인 방문자도 미국에 머무는 동안 프랑스의 사회보장제도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깨달았다. 미국은 부를 가졌지만, 그에 상응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런 말들과 논쟁을 회고하는 것은 흔히 그런 것처럼, 1917년 10월 사건들과 그 결과를 역사가 다소 쓸어버리고 조롱한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사회주의 혁명은 뜻밖에도 당시 유럽에서 가장 산업화가 덜 된 사회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의 시나리오에 따라 프롤레타리아가 집권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노동당이 그랬듯이) 권력은 공산당이 잡았다-즉, 방대한 러시아 인구 가운데 극소수, 약 10만여 명이 권력을 잡았다.
공적 연설은 계급투쟁, 실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상대적 빈곤화, 변증법적 유물론, 물질적 토대, 놀랍도록 행복한 무계급 사회의 도래 등 신성불가침의 상투적 문구를 계속 되풀이했다. 그러나 다른 이데올로기나 종교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전체가 그 지위 덕분에 실제 삶을 다룰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어쨌든 그들에 앞서 20세기 전환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혁명가들은 언제나 관념이란 실제 삶에서, 실천에서 형성될 때만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촘촘히 짜인 관념 체계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수백만 명의 실제 경험에서 구현될 때만 유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식으로 ‘실재적인 것’이 되면’, 곧 ‘최신의 것’이 되면, 마르크스주의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고도로 산업화된 유럽 혹은 아메리카의 모든 국가를 보면 보편 교육은 더 많은 전문가를 배출하고 더 낮은 수준의 일반 문화를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지적 엘리트를 형성한 사람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라도 같은 수를 유지했다. 소수의 지적 엘리트와 전통적인 문명이 유지해온 다수의 문맹 대중 대신에 현대 문명은 소수의 엘리트, 그보다 더 소수의 문맹, 그리고 고급 지적 수련이 아닌 직업 교육을 받은 대중으로 구성된 한층 더 복잡한 그림을 보여준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