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선은 등단 초기부터 나무와 더불어 살기를 좋아했던 ‘자연의 순례자’였다. 가령 「나무에 기대다」에서 “나무가 꽃 피운 열매들, 떨어진 잎사귀들을/ 다시 제 몸으로 걷어들여 꽃 피운 향기들,/ 그러한 나무에 온갖 것들을 기대고 살고 싶은 나무 아닌 나”(『저녁의 첼로』, 민음사, 1993, p.12) 같은 부분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거니와, 그런 성정은 이제 더욱 깊어진 것 같다.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숲에서 숲속으로」에서 숲은 단순한 배경이나 주어진 환경이 아니다. ‘숲에서 숲속으로’라고 굳이 ‘숲속’을 강조한 것은 숲과 인간의 분리를 넘어서기 위함이다. 숲을 배경 삼아 멋진 사진을 찍어대던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멀찌감치 비켜나 있다. 숲속에서 인간은 숲의 한 분자가 되어 다른 무수한 분자들과 같이 호흡하고 스며든다. 이 자연의 순례자는 숲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숲과 나무들에 고해를 먼저 단행한다.
「숲이 나를 허락한다면」에서 시인은 무엇보다 “인간의 시선이 숲에 닿으면 그때부터 여지없이 들려온 도끼 소리”부터 반성한다. 인류의 도끼 문명이 성장할 때 “숲은 딸꾹 숨 감추고, 모든 생명이 무용(無用)이 되어서, 곁눈의 바람도 나뭇잎 뒤에 숨어서, 소리도 화석 틈으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음에 유감을 표한다. 그러면서 아직 “숲이 숲이었을 때”의 야생의 기억을 풍경처럼 환기한다. …… 그러니까 도끼를 들지 않은 이 작은 자연의 순례자는 “숲의 무언가”가 되고 싶은 것이다. 숲을 대상화, 타자화하지 않고 숲과의 상호주체성을 획득하기를 소망한다. 아니 더욱 겸손하게 숲의 스승들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야 숲의 오케스트라에 동참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숲의 안부
숲의 소식 그리고
숲의 스승들이 나누는 아주 일상적인 대화
그런 숲의 속삭임
나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숲이 나를 허락한다면
-「숲이 나를 허락한다면」 4연
『롱고롱고 숲』 Ⅰ부의 마지막 시편인 「구름책」은 숲속의 오랑우탄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절창이다. 오랑우탄-시인의 극적인 경지를 선사한다.
나무의 무성한 잎 틈바구니로
하늘 올려다보면
나무의 수많은 가르침이 상형문자로 적힌
구름책
만날 수 있다
하늘 가장 앞자리에 자리 잡은 거미가
바람이 넘기는 책갈피 한 장
한 장
다리 뻗고 읽고 있다
-「구름책」 전문
이 오랑우탄의 구름책에 대해서는 군말이 필요 없다. 아니 군말이나 덧말은 이 시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겠다. 겸허하게 구름책 읽기에 거미처럼 동참하는 게 제일 좋다. 이 구름책은 오로지 숲에서만 감각할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읽으면서 탄력적으로 새로 쓰는 텍스트다.
이 시집 『롱고롱고 숲』을 닫는 끝 시 「그 미소에 길을 잃다」에서 시인은 대자연의 미소에 홀려 길을 잃었는데도 걱정이 없다고 했다. “걱정도 잃어버렸을까?” 그러면서 해탈의 경지에 가까이 가려는 것일까, 우리의 오랑우탄-시인은? 길을 잃음으로써 길을 얻은 것일까, 역설적으로? 여섯 번째 대멸종의 위기를 성찰하고자 오랑우탄-시인은 숲에서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거기서 대자연의 순례자가 되어 구름책의 시창작교실에 동참했다. 그것은 야생의 풍경이 되는 것이기도 했고, 그러면서 오래된 야생의 기억을 환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공포와 불안과 걱정을 그로테스크하게 극화하면서 지구 살림을 위한 책임의 윤리를 제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충분과 겸손의 미학으로 승화하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극화니 승화니 하는 말도 필요 없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생각을 계속 비우면서, 나 중심이나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 오롯한 숲속 우주의 감각을 구름책의 도움을 받아 옮겨놓은 것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구름책을 따라 천상 나비들의 날갯짓을 공경하는 겸손한 시인, 한없이 자유롭지만 누구보다도 공존과 공생의 윤리에 충실한 오랑우탄-시인, 『롱고롱고 숲』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런 생태시인의 초상을 그려볼 수 있겠다.
---「해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