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의 근본 원리라는 진실을 놓치지 않는 한, 나는 이 책에 혁신적인 내용을 거리낌 없이 엮어 넣었다. 그리스 비극 『일리아스』와 셰익스피어의 희곡 『폭풍우』, 『한여름 밤의 꿈』 그리고 무엇보다 밀턴의 『실낙원』은 이러한 원칙을 잘 지킨 명작이다. 소설 쓰기라는 노동을 통해 즐거움을 주고받으려는 열망 외에 다른 욕심은 없는 소설가라면, 인간의 수많은 감정을 아름답고 절묘하게 조합하여 가장 고결한 시를 빚어낸다는 원칙을 자기 작품에 겸허히 적용하리라.
--- p.10, 「서문」중에서
이제 부패의 원인과 진전사항을 살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하 납골당이나 시체안치소에서 수일 밤낮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여린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대상을 살피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인간의 정교한 몸이 어떻게 썩고 부패하는지 살폈고, 생명력이 피어오르던 뺨이 죽음에 잠식당하는 것을 목도했으며, 경이로운 눈과 뇌가 벌레들 차지가 되는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이행하는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세세한 인과를 끈기 있게 살피고 분석했지요.
그러다 마침내 이 어둠의 한가운데서 갑자기 한 줄기 빛이 나를 비추었습니다. 지극히 찬란하고 경이로운 동시에 너무나 단순해서 그것이 알려주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에 아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같은 과학을 추구하던 수많은 천재 중에서 나 홀로 이토록 충격적인 비밀을 알아냈다는 것이 경악스럽기도 했습니다.
--- pp.59-60, 「1부 3장」중에서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어둠 속에서 형상 하나가 보였습니다. 내 근처의 나무 등걸 뒤로 움직이는 형상이었습니다. 얼어붙은 듯 서서 뚫어져라 응시했지요. 잘못 보았을 리 없었습니다. 번개의 섬광에 그 형체의 모습이 명료히 보였습니다. 거대한 체격과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을 흉측한 외양을 보는 즉시 그것은 내가 생명을 준 더러운 악마, 흉측한 괴물임을 알아차렸어요. 그놈은 거기서 뭘 하고 있었을까요? 그놈이 동생을 살해했을까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가 딱딱 부딪고 몸을 가눌 수 없어 나무에 기대야 했어요.
휙 지나가는 바람 때문에 그리고 어둠 때문에 놈을 놓쳤습니다. 인간의 탈을 쓴 채 그토록 아름다운 아이를 죽였을 리 없었어요. 놈이 살인자가 틀림없었습니다! 확실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진실임을 입증하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였습니다. 그 악마를 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헛일이었습니다. 번개가 다시 쳐서 놈을 비추자 이미 몽살레브 산의 깎아지른 벼랑 바위 틈새에 매달려 있더군요. 놈은 순식간에 정상에 오른 다음 사라졌습니다.
--- pp.92-93, 「1부 6장」중에서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치게 싫은, 내가 끔찍한 존재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왜 기억하라는 것이지? 혐오스러운 악마! 네가 빛을 처음으로 본 그날에 저주가 있기를! 너를 만든 두 손에 저주가 있기를(그게 바로 나지만)! 너는 나를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하게 만들었어. 널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고민할 기운도 없다고. 썩 꺼져! 흉물스러운 모습을 보지 않게 말이다.”
“내 창조주여, 그대의 고통을 덜어드리리다.” 괴물은 이렇게 말하고는 그 끔찍한 두 손으로 내 두 눈을 가리더군요. 나는 난폭하게 그 손아귀를 뿌리쳤습니다. (…)
말을 마치자 그는 빙상을 가로질러 길을 안내했습니다. 나는 뒤를 따랐습니다. 가슴이 꽉 막혀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두막을 향해 가면서 그가 사용했던 다양한 논거를 가늠해보았고 적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작심했습니다. 호기심도 있었지만, 결심을 굳힌 것은 연민이었습니다. (…) 놈의 악행을 탓하기 전에 놈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처음으로 들더군요.
--- pp.128-129, 「2부 2장」중에서
나는 말을 멈추었소. 이제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소. 이 순간, 영원히 행복을 박탈당하던가 선물로 받던가 둘 중 하나가 되는 것이었소. 노인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굳건해지려 했지만, 허사였어요. 남은 힘이 다 소진되었기 때문이오. 나는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큰 소리로 흐느꼈소. 그 순간 젊은 식구들의 말소리가 들렸소. 낭비할 시간이 없었소. 노인의 손을 부여잡고 소리쳤소.
“지금이 그때입니다! 저를 구해주십시오. 보호해주십시오! 제가 찾는 친구들은 어르신과 어르신의 가족분들입니다! 심판 때 저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하느님 맙소사!” 노인이 외쳤소. “당신은 누구요?”
--- p.172, 「2부 8장」중에서
몸서리나고 심장이 주저앉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고개를 들자 악마가 달빛을 받아 창틀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신이 요청한 일을 수행하는 나를 응시하며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짓느라 괴물의 입가에는 주름이 잡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나의 여행길을 뒤쫓아왔던 것입니다. 숲을 배회하고, 동굴에 몸을 숨기고, 광막하고 황량한 들판에서 은신처를 찾았겠지요. 그러다 이제 일의 진척 상황을 확인하고는 약속을 이행하라고 재촉하러 나타난 것입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괴물의 얼굴에는 극도의 악의와 배신의 표정이 드러났습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나는 그와 똑같은 존재를 하나 더 만들어준다던 약속을 생각해내고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작업 중이던 존재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괴물은 자기 미래의 행복이 달려 있던 피조물이 내 손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자 사악한 절망과 복수심으로 울부짖으며 사라졌습니다.
--- pp.216-217,「3부 3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