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농업과 식량에 대해 다양한 위험을 부각시켰다. 그것을 깨닫고, 전 세계가 보조를 맞추어 행동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인류가 기아를 회피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르는 갈림길이 될 것이다. 농업은 어느 나라에서든 국민과 국토를 지키는 기반이며 식량이 제약 없이 세계적으로 거래되는 안정적인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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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 말하면 풍요로운 농지인 체르노젬이 전쟁터가 된 것이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이며, 전 세계에 식량위기의 씨앗이 뿌려진 커다란 지정학적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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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의 순조로운 발전에는 중국이 깊게 관련되어 있다. 2013년 중국이 유럽,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지역과 경제, 외교, 문화 등 폭넓은 분야에서 관계를 강화할 목적으로 내세운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에 우크라이나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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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밀과 옥수수, 석유, 천연가스 등의 가격이 일제히 급등한 가운데 쌀만은 시세가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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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말, 유엔과 튀르키예가 중재하고 러시아가 안전을 보장하는 형태로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오데사 항에서 5개월 만에 출항한 곡물 운반선에는 인간의 주식이 아니라 가축 사료용 옥수수가 실려 있었다. 이는 세계 농업과 음식의 실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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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이집트, 이란, 페루 등 개발도상국들도 육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축산 진흥책을 펼쳐 사료 곡물의 수입을 확대하고 있다. 신흥국과 개발도상국들이 사료 곡물 쟁탈전에 뛰어들기 시 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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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을 필요로 하는 인류 전체가 지구 온난화를 촉진하는 요인이며, 그 결과는 식량위기의 형태로 부메랑처럼 돌아온다는 것이다. 인류는 의도치 않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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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표면의 3분의 2가 바다, 호수, 하천 등 물(13.9억 세제 곱킬로미터)로 덮여 있어 ‘물의 별’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담수 는 전체의 불과 2.5%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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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농업이 직면한 눈앞의 과제는 오히려 과잉 생산에 있고, 이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미국, EU, 캐나다, 호주 등의 선진국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선진국이 생산하는 옥수수, 사탕수수, 유채씨 등의 잉여 농산물이 에탄올 같은 바이오 연료가 되어 지구 온난화 대책의 핵심인 탄소중립으로 가는 큰 흐름 속에 있다는 점이다. 바이오 연료의 수요가 새로운 성장기에 접어든 지금, 인류와 자동차 등의 수송 수단이 식량이 될 수 있는 농산물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시작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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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사탕수수, 대두, 유채씨 등 식용 작물의 원료로 만든 바이오 연료는 ‘제1세대’라고 하며, 곡물 원료를 벗어난 셀룰로오스계나 폐식유 등 비식물 원료로 만든 것은 ‘제2세대’ 또는 ‘선진적인(advanced) 바이오 연료’라고 한다. 바이오에탄올과 바이오디젤은 화석 유래 휘발유와 디젤유에 혼입해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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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가 바이오 연료 생산 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선 배경에는 농업·농촌의 진흥 외에 1990년대 이후 온실가스 감축의 정책적 우선도가 높아진 점, 21세기 들어 유가가 상승해 이를 조달하는 측면을 포함해 에너지 안보상 필요성이 높아졌다는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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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이후 세계적으로 곡물 등의 농산물을 원료로 하는 바이오 연료의 생산이 확대되면서 바이오 연료의 원료용으로 사용하는 농지가 확대되었다. 그러면서 토지 이용 전환에 따른 식량 가격의 급등, 간접적인 온실가스 배출에 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그 결과 농산물 유래 바이오 연료의 도입 목적인 온실가스 배출 억제에 바이오 연료가 효과적인지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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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유는 기름야자 열매에서 얻는 식물 기름이며, 마가린의 원료가 되고, 초콜릿, 감자칩, 즉석면 등 다양한 가공식품에 이용된다. 식품 포장지에는 ‘식물유지’라고만 적혀 있어서 일반 소비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 식물 기름 소비량에서 유채 기름에 이어 2위로 대두유보다 많이 사용되고 있다. 21세기 들어 팜유는 식용뿐 아니라 바이오 연료의 원료로 주목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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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바이오 연료가 인류의 식량이 된다면 우크라이나 위기로 생긴 곡물 급등은 충분히 피했을 것이다. 물론 과잉 생산, 재고 압력으로 곡물 가격이 폭락할 위험도 있다. 인류에게 “식량이냐, 연료냐”라는 논의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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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밀을 50% 이상 수입할 정도로 밀 생산량이 많지 않다. 이것이 아프리카에서 식량위기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주요 원인이다. 즉, 개발도상국이면서도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취약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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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프리카 국가들은 자국 농민의 보호와 농업 발전, 식량 안보를 목표로 삼지 않았을까? 중국이나 인도와 비교했을 때 아프리카 국가들이 농업 강화, 식량 증산을 경시한 배경에는 외국에서 재정 지원이나 식량원조가 있고, 동시에 주식 곡물을 저가격에 안정적으로 수입할 수 있었던 요인이 있다. 게다가 중국, 인도 등의 아시아 나라들은 많은 인구를 등에 지고 항상 식량위기의 공포에 시달려 식량의 자급자족을 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있었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부에게는 그런 위기감 이 희미했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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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야기한 식량위기는 밀과 옥수수 등의 곡물 수급에만 차질을 빚은 것이 아니다. 20세기 후반 이후 급증하는 세계 인구를 떠받친 곡물 증산의 주요 원인인 화학 비료의 수급에도 차질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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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비료 가격의 고공행진이 장기화되면 세계 농업은 화학 비료의 사용을 줄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곡물 가격의 상승 이상으로 비료 가격이 치솟아 비료 투입의 경제성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발도상국 대다수는 자금이 부족해 비료 투입이 급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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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발전이 차이가 나는 요인은 외자의 직접투자와 부존자원의 상황, 부족 사이의 관계, 지정학적 위치 등 다양하다. 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식량의 자급자족 체제에 있다.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은 국민을 안심시킬 뿐 아니라 수입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외자 균형을 크게 개선하고 경제활동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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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적이고 비용이 낮으며, 에너지가 절약되는 지속 가능한 농업에 대한 도전으로 비료 수입량이 증가 추세인 일본과 한국도 이런 에코시스템을 적극적으로 구축해 세계에 퍼뜨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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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중국과 대립하면서도 농산물의 대중 수출을 중시하고 있고, 중국도 수입의 니즈가 확실하다는 점이다. 또 멕시코, 콜롬비아, 페루 등 같은 미주대륙 국가들의 미국 수입도 최근 들어 급속히 늘고 있다. 덧붙여 3장에서도 언급했듯이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등에서 가뭄, 기온 상승에 의한 흉작 등의 리스크가 앞으로 확실히 높아진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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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이런 열린 농업과 농산물 거래에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말고, 세계 수준의 과제를 해결하는 농업 기술을 수출하는 데에 노력하는 것이 자국의 식량 안보를 더욱 확고히 할 것이다. 그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의 분단과는 다른 열린 국제 곡물 시장을 유지해줄 것이다. 식량 안보는 세계와의 조화 없이는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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