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일종의 “다이너마이트”다. 니체와 함께할 때 우리는 우리의 병든 본성을 깨닫는다. 우리의 삶이 어떤 점에서 조금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삶 자체가 병든 것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니체의 폭발력은 무시무시하다. 이걸 다 감당하기란 정말 역부족이다. 하지만, “수천 년 동안의 거짓”에 맞서는 “대립자” 니체와 함께 우리는 “희망이 비로소 나와 함께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참으로 건강한가, 참으로 이 삶을 사랑하는가, 참으로 이 실존을 긍정하는가, 참으로 이 세계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가. 이런 말들이 저 다이너마이트 니체의 언명들과 함께 우리의 삶을 휘돌고, 우리로 하여금 용기를 발휘하게 한다. 병들 것인가, 건강할 것인가.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이 정치의 진정한 주제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이 앞으로 우리 삶의 리트머스 시험지이자 시금석이 될 것이다.
--- pp.25~26
살다 보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상황과 장소와 주거지와 사회 속에서 수년 동안을 참아 가면서 버티고 있을 때”가 있다. 이때 이런 우연적인 상황들을 바꾸려고 하다가는 원한의 생리학처럼 자신의 에너지를 급격히 소진해 버리고 말게 된다. 이럴 때는 차라리 러시아적 숙명주의로 버텨야 한다. 삶이 다시 풍부해질 때까지. 우리에게 질병은 이렇게 찾아오는 법이다. 익숙하고 반복적인 삶이 어느 순간 굴레로 작용할 때, 내가 미처 바꿀 틈도 없이 상황이 견고하게 들이닥칠 때. 내 삶이 위태해지는 그 순간이 바로 질병의 순간이다. 이때는 결코 “자신을 다르게” 원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하다가는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한 책임을 다른 존재나 삶에 돌리는 수가 있으니 말이다(이것이 바로 원한이다).
--- pp.33~34
가책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타고나면서부터 가책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실제로 가책을 모르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라고 다 자신이 겪는 ‘고통’에 대해 ‘죄’라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으로 반응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간은 (최소한 종교적인 의미에서라도)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계보학자의 시선으로 역사의 다양한 결들, 그 사건의 결들, 그 우연적 결합의 결들을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성급한 전망과 대안 속에서 또다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길은 너무 환히 보여도 의심스럽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하소연도 믿을 건 못 된다. 아직 계보학적 시선이 부족한 것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어떤 질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왜 우리가 고통에 대해 죄라고 하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죄 앞에서 우리가 부덕한 삶을 반성하고 경건한 삶으로 회귀할 조건을 발견하는 한, 그런 해석도 삶에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 말이다. 윤리적으로 중요한 질문이다.
--- pp.124~125
우리 시대 강자들은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한다. 그 싸움이 바로 ‘평등’이라는 슬로건 속에 표현되고 있다. 우리도 남성과 동등하다, 우리도 정상인과 동등한 인간이다, 우리도 백인과 동등한 인간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척도,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르는 척도, 남성과 여성을 위계적으로 가르는 척도, 그런 근거도 없고 무가치한 척도들을 문제 삼는 것, 이것이 소수자의 평등 요구에 담긴 본질이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실체 없는 분할선을 지우고 새로운 분할선을 긋고자 하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백인과 흑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아니라 주인 대 노예, 고귀함 대 비루함, 함께하는 삶 대 고립된 삶,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 대 착취와 수탈의 관계라는 새로운 구분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이들의 평등 요구는 새로운 분할선을 긋는 것이자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창안하고자 하는 절실한 요청이다. 그것은 삶을 평준화하고자 하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 더 고귀해지기 위한 싸움이다.
--- pp.189~190
진리라는 척도가 사라졌으니, 자유의지라는 비논리가 사라졌으니, 죄와 벌의 해석학이 분쇄됐으니 사유는 새로운 인식의 모험을 향한 항해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강한 염세주의를 갖는다. 낯설고 공포스러운 것으로의 항해. 삶이 긍정의 능력에 이를 때까지 진리의지에 묶인 부정적 사유를 해체하는 모험. 삶에서 어떤 부분을 도려내 부정하고 증오하는 것을 멈출 때, 한 존재의 숙명이 ‘이미 존재했었고 앞으로도 존재할 모든 것의 숙명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삶은 사유에게 모든 것을 선사한다. 이때만 ‘삶은 사유의 수단’이 되고, 사유는 삶을 긍정성으로 휘황찬란하게 바꿔 준다. 사유가 진리의지에 갇혀 참과 거짓, 참된 세계와 가상세계를 분별할 때 삶은 결코 사유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사유가 삶을 재단하고 부정하고 왜곡하게 되며, 결국 사유가 삶에서 배우고자 하기보다 삶을 단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 pp.283~284
비천한 삶이 차이를 부정하길 원한다면, 고귀한 삶은 차이를 향유하고 차이를 긍정하길 원한다. 삶이 긍정의 형식일 수 있는 것은 차이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예술을 중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계속되는 거짓과 가상에 대한 창조, 이것만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정신이 어떻게 세계를 긍정할 수 있단 말인가. 삶에서 새로운 선물을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삶에 대한 사랑, 운명애는 삶에 대한 체념적 수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귀처럼 모든 부정에 대해 ‘예’라고만 하는 부정의 정신은 자신의 긍정이 부정에 이르고 만다는 사실을 모른다. 운명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창조를 요청한다. 창조할 수 있기 때문에 삶은 가벼워진다.
--- pp.353~354
내가 어떤 행위를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다. 그 모든 것이 나의 행위다. 캄캄한 미래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저하고 있어도 그 주저함을 통해 사건은 일어난다. 그러니 어떻게든 행동해야 하는 법이다. 돌파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늘 이런 시간을 살아간다. 신의 계획대로 운영되는 세계는 공상의 세계일 뿐이다. 들뢰즈가 한 말이 있다. 신이 계산을 하면서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 계산들이 만약 정확히 맞아떨어졌다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만큼 세계는 계산가능성을 넘어서는 신비롭고 매혹적인 존재다.
--- p.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