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이드 선생의 게르마늄 목걸이 예찬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뻔한 상술이지, 저거 하나 팔면 몇 프로나 받아갈까, 이래서 패키지여행은 오기 싫었다니까, 하면서도 자꾸 듣다보면 가이드 선생의 진정성 있는 추천사가 마음에 걸리고, 어쨌든 과학적으로 효과는 증명됐다고 하니까(논문도 있고 하여튼 과학자들이란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들일 텐데 그 사람들이 좋다고 했다니까) 게르마늄 목걸이란 것이 면역력 증진과 자연치유력 복원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린다. 고향에 계신(정기는 서교동에서 나고 자랐다) 부모님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전 같지 않게 한번 술을 마시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끙끙대며 숙취로 고생하는 자신의 모습도 되돌아보고, 아무래도 우리는 현대인이고 하다보니 게르마늄 목걸이 하나쯤 있어야지 싶다가도 만만치 않은 가격을 들으면 선뜻 손이 가지 않던 경험,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현수는 생각했다고 한다. 온 국민이 부담 없이 게르마늄 목걸이 하나쯤은 차고 다닐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 pp.11~12 「실화」
김민희씨는 피아노에 기대 쉬고 있던 트럼펫 주자에게 쪽지를 건넸다. 신청곡은 김상국의 〈불나비〉였다. 그녀는 전주가 시작될 때 무대로 나가서 눈치 없는 직장상사처럼 마이크를 잡았다.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노래를 시작하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이 휘파람을 불었다. 재키 할머니는 가요를 듣지 않았다. 가사가 귀에 들어오면 정신이 산만해진다는 게 이유였다. 내용 없이 흘러가는 것들이 편했던 거다. 한때나마 아저씨를 좋아했다면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 pp.59~60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
“정대리야, 이렇게 황홀한 행사는 내 평생 본 적이 없다.”
“과장님, 우리 삶에 더 아름다운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정말?”
“네, 정말이라니까요.”
나는 이동진의 손을 잡고 공장 정문을 향해 뻗어 있는 레드 카펫 위로 걸음을 옮겼다. 본부장도, 김부장도, 사장도 어느새 우리 옆에 와서 박수를 쳤다. 오정환 사원이 발레 하듯 경쾌한 동작으로 춤추며 우리 앞에 종이 꽃가루를 뿌리고 지나갔다. 우리는 일곱 가지 색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얼음 무지개 위를 건너 능이버섯으로 가득찬 천상의 정원에 닿았다.
--- pp.92~93 「신년하례」
오늘의 일은 어제처럼 순조롭고 반장의 얼굴에는 따분함이 묻어 있다. 나와 K는 짝을 이뤄 상차 작업을 한다. 상자를 나르던 K가 손을 놓고 가만히 서 있다. 멍한 눈을 봐서는 틀림없이 딴생각을 하는 자세다. 반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K의 곁을 지나간다. 정신없이 바쁠 때도 K와 나는 경쟁하듯 딴생각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딴생각을 하기 위해 일을 나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건 모든 걸 생각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정확한 생각을 하는 것에 자신이 없다면 딴생각을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딴생각을 정확히 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 p.97 「699.77」
이런 생각은 생전 처음 해본 건데,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고모한테 잘못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비가 이렇게 무섭게 여기저기 내리는데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여름을 보내고 있는 것이 ‘Is it because I lied to my 큰고모네’여서 그런 건 아닐지…… 음을 붙여 불러보니 가사가 딱 맞았다. 순간 머리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 p.132 「곳에 따라 소나기」
그날따라 손님이 나타나는 족족 다른 기사가 한 발 먼저 차머리를 들이밀었다. 안 되는 날인가 싶어 시내로 나갈 요량이었다. 우회전을 하려는데, 익숙한 얼굴이 블루스퀘어 앞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거리가 꽤 됐지만 한눈에 명이란 걸 알아봤다. 한꺼번에 차선을 세 개나 건너뛰었다. 유턴 신호를 기다리는 내내 명이 자리를 떠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라디오에서는 김신영이 〈정오의 희망곡〉 클로징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희망이 사라져가는 기분이 들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명을 놓치면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 pp.152~153 「싱가포르」
겉보기엔 그럴싸했지만 사실 벼룩들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진을 찍지도 않고, 흙을 파고 들어가지도 않으며, 대기 성분을 분석하지도 않았다. 앞으로 가고, 뒤로 가고, 옆으로 가는 게 전부였다. 이우선은 벼룩들이 사선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 가장 많은 개발비가 투입됐다고 말해줬다. 탐사선이 발사되기 얼마 전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녀가 직접 밝힌 벼룩의 콘셉트는 ‘싸고 단순한 기계를 많이’였다. 어쩐지 시대적인 요구와도 부합하는 문구처럼 들렸던 탓에 많은 언론사가 기사 제목으로 썼다. 아내는 확실히 스타가 될 자질이 있었다. 잘만 하면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고, 그랬다면 미친 과학자가 세계를 망치는 전형에 부합했을 것이다. 못해도 과학기술부 장관 정도는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미친 과학자는 세계 대신 내각을 망쳤을 것이다.
--- pp.「어쨌든 하루하루」, 186~187쪽
이 소설이 완성된다고 해도 어딘가에 버젓이 게재하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이인제’의…… ‘이인제의 나라’ 같은 것에…… 관심을 갖겠느냐는 말이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노년의 남성, 정치적으로 좌절하고 인간적인 매력이 다소 떨어지는, 피닉제니 뭐니 하며 놀림감이나 되는 그런 ‘이인제’에게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인제의 나라」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한명숙의 나라」 같은 것을 쓰면 그때부턴 정말로 무거워진다. 진짜 어떤 나라에 대해서 써야 할 의무 같은 게 생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인제의 나라」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내가 쓸 수 있고 써야 하는 유일한 나라처럼 생각됐다.
--- pp.214~215 「이인제의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