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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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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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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23쪽 | 488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39203976
ISBN10 8939203976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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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YES24 리뷰 YES24 리뷰 보이기/감추기

--- 김정희 candy@yes24.com
올해로 고희를 맞은 박완서 선생이 5년 만에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을 냈다. 또 올해는 선생의 등단 30주년이 되는 해. 이에 맞춰 문학계간지 『작가세계』는 이번 겨울호를 박완서 특집으로 꾸미고 있다.

그런데 사실 나이 칠십이면 이미 은퇴해 소일거리를 하며 보내거나 손주들을 돌보며 나머지 인생을 보내는 것이 주위의 평범한 풍경이 아닌가. 소설가 현기영은 이 책의 표지에 실은 헌사에서 "칠순 나이에도 고갈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충만해진 이 영혼의 샘물,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적고 있는데, 선생의 왕성한 필력에 힘입은 이 책이 일견 기이하고 생경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편견은 아닐 듯하다.

박사학위를 받고, 언론에 명의로까지 소개된 유명한 의사 영빈이 이 책의 주요 화자이다. 영빈은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서 초등학교 동창 현금과 마주친다. 둘은 불륜관계로 발전한다. 영빈의 여동생 영묘의 시댁은 재벌 Y건업이다. 영묘의 남편은 폐암을 선고받지만 시댁식구들은 죽어 가는 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겉으로는 가족애로 빙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게 해, 영묘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속셈이다. 현금은 나이 마흔여섯에 영빈의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만 가임기가 지났음을 알게되고, 나이 마흔인 영빈의 처 수경은 아들을 낳기 위해 '계획된 임신'을 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각은 박완서 소설의 오랜 축이며 화두이기도 하다. 또한 작가는 '유구한 여성잔혹사'에 대해 독자의 관심을 유도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가의 기대에 걸맞게 『아주 오래된 농담』은 가족관계에까지도 분명 유효한 천박한 자본주의의 속성이나 돈에 소외되고 '아들'에게 소외되는 여성의 현실을 아주 정확히 꿰뚫고 있다.

하지만 빵으로 비유하자면 『아주 오래된 농담』은 값나가고 영양 많은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맛있게 구워지지 않아 왠지 맹숭맹숭한 빵일지도 모른다. '이건 이런 빵이 되어야 해!'라고 외치는 요리사의 주장이 강해 먹기에 좀 부담스러운 빵이다. 이를테면 영빈이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계기, 영빈과 현금의 만남, 영빈 동생 영묘의 남편이 재벌그룹의 장남이고, 이러한 그가 폐암환자라는 점 등. 각각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런 말을 해야 하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되어야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되어야해, 라고 판을 짜는 작가의 의도가 자꾸 눈에 밟힌다.

인물의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기인한다. 인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왜 그렇게 말을 하는지, 어쩐지 정당성이 좀 부족해 한 인물을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재미없는 연극을 보는 느낌이랄까? 예컨대 아들을 갖기 위한 계획된 임신을 둘러싸고 나누는 이야기는 사십대 중년부부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 "아들 없는 게 당신 책임인가, 왜 당신을 주눅들게 해." "바로 당신의 그런 태도가 어머니는 못마땅하셨던 거예요. ...특히 영묘 아가씨가 그렇게 되는 거 지켜보면서 이 나라에서 딸의 부모 노릇 한다는 것의 의미를 곰곰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나봐. 그런 굴욕을 아들 없이 견딘다는 건 너무 비참할 것 같잖아요." ..."역시 당신은 이 유구하고도 심각한 문제를 정면돌파하기를 꺼리는군요. 겁쟁이, 당신 같은 도덕군자가 여자들을 얼마나 골탕먹이는지 알기나 알아요?" ..

"당신이 원하면 그렇게 할게. 부탁인데 나한테서는 그런 스트레스 받지 말아요. 그 동안 당신의 며느리 설움을 너무 몰라라 한 건 내가 사과할게. 우리 사회가 여자에게 얼마나 악랄하고 불리하게 돼먹었다는 건, 영묘 때문에 속 썩이면서 치떨리게 겪었잖아. ...시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비해 힘이 딸리는 건 아직도 딸의 부모들이 딸 가진 설움을 아들에 의해 보상받으려는 구닥다리 생각에 젖어 있기 때문이야. 보상받을 길 없는 딸딸이 아빠가 늘어날수록 딸들이 사람 노릇 할 수 있는 정당한 노력이 힘을 받게 될 거 아닌가."」

생명력이 있는 유기체처럼 섬세하게 해체되고 응집되어 결국 빠른 화면 가운데의 정지 화면처럼 깊은 각성(覺醒)의 순간을 소설을 통해 경험할 수는 없을까? 어떤 인물에 철저하게 감정이입되어 그 인물이 느끼는 대로 슬퍼하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웃고 울어 결국 소설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맛보고자 한 독자로서의 기대는 결국 요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오래된 농담』을 읽은 것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말처럼 '유구한 여성잔혹사'가 기저에 깔린 한국사회에서 고희를 맞은 여성이 생산해낸 이야기를 소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나고 또한 숙연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형은 가족의 이름으로 얽매이는 걸 젤 혐오했었잖아?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미국으로 뜬 거 아니었어? 형한테 편지 쓰고 또 쓰면서도 형이 옛날에 끊어버린 가족이란 끈을 내가 헛되이 이으려는구나, 자신이 초라해지곤 했더랬어.'

'떠날 때는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각오나 심정 같은 건 다 잊어버렸지만, 마침내 한국적 상황에서 놓여났다는 황홀한 자유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한데 그게 그런거였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네가 그렇게 말하니 슬그머니 억울해지려고 한다. 그 동안 난 한번도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적이 없었거든. 그건 가족이 구속이 됐다는 뜻이 아니라 힘이 됐다는 뜻이야. 가족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했다면 무슨수로 살아남았겠냐. 그건 나만이 아니라 다들 그래...... 한국 사람이 왜 박사학위도 빨리 따고, 돈도 억척스럽게 벌수 있는 줄 아냐. 가족한테 보답하려고 자랑하려고 그럴 수 있는거야.'
--- pp.300-302
현금은 그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명함을 한 장 주었다. 명함에는 '돌피'라는 카페 이름과 그 약도까지 있었지만 현금의 이름은 없었다.
'찢어지는 명함이야.'
'무슨 뜻이야?'
'요샌 안 찢어지는 질긴 명함도 많쟎아. 생각나면 한 번 들러.
찢어버리고 싶어도 할 수 없구.'
--- p.284
혀가 풀렸나봐. 답장도 안해주는 형한테 또 쓰고 싶어진 걸 보면 혀가 풀려도 제어 할수 없이 풀린게 아닌가 슬그머니 걱정이 되네. 매일매일 컴퓨터를 켤때마다 편지부터 열어보게 돼. 그 기대감이 나쁘지 않아. 하소연만 하고 싶은게 아니라 위로 받고 싶나봐. 쓰잘데 없는 편지함의 잡동사니들을 다 지워버리고 나면 오늘도 아무것도 못 건졌다는게 그렇게 처량 할 수가 없네..
--- p.241
해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무렵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한대.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낯설어 보이는 섬뜻한 시간이라는 뜻이라나 봐.나는 그 반대야.낯설고 적대적이던 사물들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고 친수해지는 게 바로 그 시간이야.... 얼마든지 화해하고 스며들 수 있도 있을 것 같은 세상으로 바뀌는 시간이 나는 좋아.
--- p.97
이렇게 사람은 각각 제 나름데로 죽는다. 이 세상에 안죽는 사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죽을 때는 자기만 죽는 것처럼 억울해 하는건 이런 불공평 때문일까. 육신의 사멸은 의학이 예측할 수 있는 경과를 밝지만 정신의 사멸을 아니다. 무도 없는 무, 호김심조차 거부하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육신의 사멸은 의학이 예측할 수 있는 경과를 밝지만 정신의 사멸은 전혀 아니다.
--- 본문 중에서
'우린 한가족이야. 미안할 게 뭐 있어'

'형은 가족의 이름으로 얽매이는 걸 젤 혐오했잖아?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미국으로 뜬 거 아니었어? 형 한테 편지 쓰고 또 쓰면서도 형이 옛날에 끊어버린 가족이란 끈을 내가 헛되이 이으려는구나, 자신이 초라해지곤 했더랬어.'

'떠날 때는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각오나 심정 같은 건 다 잊어버렸지만, 마침내 한국적 상황에서 놓여났다는 황홀한 자유의 느낌은 지금도 생생힌 데 그게 그런거 였느지도 모르지...'
--- p.300
우리의 죽음이나 탄생을 황폐하게 만드는 현실의 질서 속에서 '난 죽고 싶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선옥의 평론중에서
우리에게 결핍된 건 기쁨이었다. 피고 지는 꽃처럼, 퍼내고 나면 다시 솟는 샘물처럼, 새로 태어나는 기쁨이 우리 사이엔 없었다---

----생전 안 죽을 것처럼 여기고 무진장 욕심을 부리는 것도 결국은 속아 사는 것이다. 투여되는 영양제나 생약이 몸을 보할지는 몰라도 환자 대신 병과 싸워줄 수는 없다. 싸울수 있는 건 환자 자신 뿐이다. 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싸울 게 아닌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걸 알고 분하고 억울해서 미칠 것 같다고 해도 그 또한 삶의 맛이다. 그게 가장 진미일 수도 있는 것을, 공포, 분노, 절망이면 왜 안돼나? 디금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건 절망이 없기 때문이다.

우체국에 안 가고도 내가 믿는 문자로 즉각 소통이 가능한 이 편리한 세상보다는 꿈자리난 육감에 의지하던 때가 훨씬 더 행복했으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 때는 적어도 핏줄이 켕기는 시대였을 테니까요.
--- p.54,--185-186, --217
우리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문득문득 골속에서도 뼛속에서도 진기가 빠져버렸다던 그의 말을 떠올렸다. 집 밥이 필요한 건 내가 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사이에 쾌락은 있었지만 기쁨은 없었다. 쾌락은 자꾸 탐하면 물리게 돼 있다. 우린 다같이 지쳐가고 있었다.

우리에게 결핍된 건 기쁨이었다. 피고 지는 꽃처럼, 퍼내고 나면 다시 솟는 샘물처럼, 새로 태어나는 기쁨이 우리 사이엔 없었다. 그가 병원에 같이 가보자고 했다. 손자를 기다리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노력은 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부모님은 핑계일 뿐 우리 생활에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건 그 자신의 갈망이라는 걸 내가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내가 피임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늦동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특수한 경우고, 보통여자의 가임기가 얼마 안 남았을 때였다. 사는 게 견딜 수 없이 지루해서 도대체 얼마나 더 살아낼 수 있을까 막막할 때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시켰다. 내가 병원에 안 가봤을 것 같으냐. 벌써 병원에 가봤는데 불임의 원인은 나한테 있다고 하더라고 둘러댔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슬퍼하는 것 같았다. 부모님한테는 불임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겠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착하고 단순한 데가 있었다. 우리처럼 나태하고 황폐한 인간도 아이만 생기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것도 그런 단순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부모에게 불임의 원인은 나에게 있다고 말하면서 이혼하고 싶다고 했다.
--- pp.53-54
영빈은 현금의 집을알고 있었다. 이층집이었다. 여름이면 이층 베란다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타고 능소화가 극성맞게 기어올라가 난간을 온통 노을 빛깔의 꽃으로 뒤덮었다. 그 꽃은 지나치게 대담하고 눈부시게 요염하여 쨍쨍한 여름날에 그집앞을 지날때는 괜히 슬퍼지려고 했다. 처음 느껴본 어렴풋한 허무의 예감이었다. 이층집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현란한 능소화 때문에 그집이 그 동네서 특별나 보인것이지,그안에 누가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일이 있은후 그 이층집은 확실하게 현금의 집이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그의 꿈속의 능소화가 만발하는 것과는 달리 그 이듬해 여름부터 현금이네 집에는 능소화가 피지 않았다. '난 느네가 이사갔다는 거 느네집에 능소화가 피지 않는 걸 보고서 처음 알았어. 되게 섭섭하더라.우린 느네보다 몇년 더 그 동네서 살았거든.어쩜 이사갈때 능소화까지 파갔냐?'

'얘는, 멍청한 소리 하고 있네. 그때 우리 쫄딱 망해서 그집 쫓겨났는데 무슨 수로 꽃나무를 파가냐? 파가길, 그집 빼앗아 이사온 아버지 친구도 우리 집에 전화 걸어 제일 먼저 한다느 소리가 어떻게 사느냐는 안부가 아니라 딴 정원수들은 다 잘 있는데 유독 능소화만 여름이 되도록 기척이 없다고 혹시 우리더러 죽이고 간게 아니냐고 항의하는 소리였어.'
'그럼 저절로 죽었단 말이지.'
'저절로 죽긴 어떻게 저절로 죽냐. 자살을 한거지.'
'자살? 나무가 말야?'
'그래 그 나무는 나를 좋아햇으니까. 나를 좋아하지 않음 내 창가에 그렇게나 예쁜 꽃을 피울수가 있겟어. 우리집 능소화처럼 화려하게 피는 능소화는 난 어디서고 본적이 없어.'
'그래도 그렇지 나무가 어떻게 자살을 하냐?'
'얘좀 봐. 왜 못해. 나무는 자살할수 없다고 누가 그래? 나무 우습게 보지 말아 너. 나무도 사랑을 잃으면 자살할수도 있다는걸 우리집 능소화가 확실하게 보여줬잖아? 그래도 못 믿겟어?'
못 믿겠다면 무슨일 낼 것처럼 눈을 똑바로 뜨고 다그쳤다.입가엔 튀긴 빵가루 부스러기가 묻어있고, 포크에는 돈가스조각이 꽃힌 채엿다. 영빈은 어이가 없어 그냥 픽 웃고 말앗다. 현금도 따라 우스면서 나머지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햇다.
'능소화가 만발했을때 베란다에 서면 마치 내가 마녀가 된것 같았어. 발밑에서 장작더미가 활활 타오르면서 불꽃이 온 몸을 핥는 것 같아서 황홀해지곤 했지.'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할수가 있냐?'
'잔다르크처럼 되는 꿈이 왜 불순해. 이 세상엔 분명히 자기를 희생할만한 가치있는것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모독하지마.'
--- p.
영묘는 망자의 눈귀에서 귓바퀴로 흘러내린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을 보았다. 핏빛 눈물이었다. 피눈물 소리를 들어보기는 했어도, 정말 피눈물이 있는지는 몰랐다.... 영묘는 망자가 그녀를 보고 싶어 눈을 못 감고 피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뒤늦게지만 눈가림을 당하고 살아왔다는 걸 깨닫고 비로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똑바로 보려 했음이 아니었을까.

그는 한 번도 죽음과 맞서보지 못했다.... 헛것만 보았지 한 번도 진실을 보지 못했다. 최후의 순간에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똑바로 보았을 것이다. 눈뜨고 죽은 모습이 보기 좋은 건 아니더라도 바보처럼 끝까지 속아 산 건 아니라는게 영묘에겐 위안이 되었다. 요절했지만 불의에 중툭이 잘린 게 아니라, 나름대로 완성된 삶으로 보고 싶었다.
--- p.206-207
어젠 비디오로 영화를 하나 봤는데 친구는 선택할 수 있어도 가족은 선택할 수 없나는 대사가 인상적이었어. 별것도 아닌 소리지. 그까짓 게 무슨 명언은 고사하고 명대사 속에나 들겠어. 그렇지만 정신이 궁지에 몰리면 어디서든지 아전인수할 건덕지를 찾게 되는 것 같아. 계속해서 그 생각만 하느라고 영화 줄거리는 놓쳐버리고 말았으니까. 아아, 그래서 어머니를 떨쳐버림으로써 영묘 문제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안 되는구나, 형이 아무리 가족을 외면하고 싶어도 아우의 편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걸, 따위 생각 말이유.
--- p.248 --영빈의 이메일 내용중
'얘좀 봐. 왜 못해. 나무는 자살할수 없다고 누가 그래? 나무 우습게 보지 말아 너. 나무도 사랑을 잃으면 자살할수도 있다는걸 우리집 능소화가 확실하게 보여줬잖아? 그래도 못 믿겠어?' 못 믿겠다면 무슨일 낼 것처럼 눈을 똑바로 뜨고 다그쳤다.입가엔 튀긴 빵가루 부스러기가 묻어있고, 포크에는 돈가스 조각이 꽃힌 채였다. 영빈은 어이가 없어 그냥 픽 웃고 말았다. 현금도 따라 웃으면서 나머지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능소화가 만발했을 때 베란다에 서면 마치 내가 마녀가 된 것 같았어. 발 밑에서 장작더미가 활활 타오르면서 불꽃이 온 몸을 핥는 것 같아서 황홀해지곤 했지.'
--- p.41
얘는,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그래 농담이지 듣는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거 그거 농담
아니니?
--- p.
아무리 봐도 현금은 미스 코리아나 탤런트하고 헷갈릴 만한 데라곤 털끝만큼도 없다. 그런 통념상의 미인을 신봉하는 눈으로 본다면 차라리 추녀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아무하도고 바꿔치기 할 수 없는 비주류의 미라고나 할 까. 걸려들기가 잘못이다. 그런 생각 때문에 현금이 이혼했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나 결혼 한 몸이야, 어쩌구 했으면 이상했을 것이다. 현금이가 세 사람중 제일 먼저 결혼했다는 건 광한테서 예전에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금이가 영빈아, 하고 부른 순간부터 그녀는 다만 현금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겐 소위 임자 있는 몸다운 소속감이랄까 딱지가 어디에도 안 붙어 있다.
--- p.39-40
사랑하는 미숙이에게

나 먼저 갈게. 거정 말아 나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우리 집하고 가게하고 들어먹는 거야. 그거 우리 둘이서 어떻게 장많나 건데 내가 다 들어먹고 가겠어. 선생님은 나 백 퍼센트 살릴 수 있다고 그랬지만 난 안 믿어. 암 걸린 사람들은 백발백중 전재산 다 들어먹어야 죽더라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생전에 자기 집 한칸 못 써보고 돌아가셨다는 거 당신도 알지. 아버지 맨날 술만 퍼마시면서 이놈의 세상은 다 붓대로 먹고 사는 먹물들 세상이다.

그것들은 배운거 없는 막노동꾼을 실컷 부려만 먹고 절대로 집 한칸 안 주는 욕심꾸러기 들이다. 이렇게 세상 욕만 하다가 셋방에서 돌아가셨지. 그런데 나느 당신같이 좋은 여자 만나 배운 거 없이도 집 장만하고 사장 소리까지 들었잖아. 난 해낸 거아. 우리 아버지가 못한 걸 난 해냈어. 그만하면 이 세상에 와서 할 도리 다한 거라고 생각해. 가게하고 집만 있으면 당신 혼자서도 우리 아이들 왕자나 공주 부럽지 않게 키울 수 있을 거야. 부탁해. 이만하면 할 도로 다하고 간다고 칭찬해 주길 바래.

당신의 남편 치킨 박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 pp.309-310
사람이란 거의 다 속아 사는거 아니니? 사랑에 속고, 시대에 속고, 이상에 속고... 일생 속아 산 것도 분한데 죽을 때까지 기만을 당해야 옳겠냐? 이런 거짓말을 강요당할 때처럼 의사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낀 적도 없다니까.'

'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 그래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
--- p.141
사람을 태어날 때 비슷하게 벌거벗고 순진무구하게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천태만상 제각기 다르다(중략) 다년간 생명운동인지 환경운동에 몸담아 왔다는 노인은 생각과 행동이 일치한 이답게 벌레하나 들꽃 한 송이도 아낄 것처럼 자비로운 인상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걸 알고부터는 혼자 죽기는 싫다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 맷돌질을 해서 삼라만상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악을악을 쓰다가 죽었다. 생전 땅파는 것밖에 모르던 농투성이 노인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악기라고는 없었다. 그 노인은 자식들과 장사치를 사람들 걱정에 춥도 덥도 않은 봄이나 가을에 죽기 하나만을 소원햇다. ..이 무욕한 노인이 최고 기온을 기록한 푹푹찌는 복중에 죽었다.
--- pp.125-126
마흔다섯 평짜리 그의 아파트는 방이 네개다. 영묘를 시집보내고 나서 남은 식구는 삼대 다섯 식구다. 제각기 방 하나씩 차지하고 나면 영민만 방이 없게 된다. 영빈은 아내와 같이 쓰는 안방을 제 방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건 아내가 아내의 취향에 맞게 꾸미고 뭐가 어디 있는지 알기 쉽게 질서를 잡아놓고 남편을 맞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방이다.
--- p.100
떠날때는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각오나 심정 같은 건 다 잊어버렸지만 마침내 한국적 상황에서 놓여났다는 황홀한 자유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한데 그게 그런거였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네가 그렇게 말하니깐 슬그머니 억울해지려고 한다. 그동안 한 번도 난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적이 없거든. 그건 가족이 구속이 됐다는 뜻이 아니라 힘이 됐다는 뜻이야. 가족을부터 힘을 받지 못했다면 무슨 수로 살아남겠냐. 그건 나만이 아니라 다들 그래.....

p.s. 굳이 이 글을 퍼올리는 것은 과연 그럴까? 하는 강한 반발심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퍼올리지 않았다면 당연히 치킨박의 유서가 이글의 백미일텐데..
--- p.300-301
'대학병원 정도의 병원에는 얼마나 여러 계급의 의사가 있는지 알아요? 줄줄이 상전이에요. 교수급의 특진의가 있고 그 아래로 전문의를 마치고 교수나 일반병원 스탭이 되기 전에 수련 받는 펠로우라고 하는 전임의, 그 아래로 각과 전문의가 되기 위해 수련 받는 레지던트 과정이 1년차 2년차 3년차 4년차까지 나누어져 있고 이들 사이에도 서로 계습이 존재라고 하는 일도 달라요. 그 및 제일 하바리에 인턴이 있는거에요. 딴 과하고 달라 6년씩이나 공부시킨 부모는 그 어려운 학교 졸업도 시켰겠다, 국가고시도 합격했겠다, 의사 다 된 줄 알고 한참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지만 인턴이라는 게 순전히 잡일군이에요. 피검사 결과지나, 방사선과 필름을 찾아온다거나 채혈이나 정맥주사를 놓는 일 따위.
--- p.24-25
다섯통의 E메일.
아우가 멀리 타국땅에 있는 형에게 보낸 E메일 주로 가족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형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담긴, 답장도 받지 못하는 형에게 보낸 메일에서 아! 가족이란 이런거지 마음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의지가 되는... 다소 혼란하고 골치아픈 이야기에서 가장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부분이었던것같다. 딱딱하고 현실에서 피하고 싶어하던 영빈이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리는 부분에서 미소를 자아냈던. 아니, 나를 한숨 돌리게 했던......
--- p.다섯통의 E- 메일
다들 왜 그렇게 속이려 드는지 모르겠어.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생각해봐. 사람이란 거의 다 속아 사는거 아니니? 사랑에 속고, 시대에 속고, 이상에 속고... 일생 속아 산 것도 분한데 죽을 때까지 기만을 당해야 옳겠냐? 이런 거짓말을 강요당할 때처럼 의사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낌 적도 없다니까.'
'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그래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 의사라고 농담하지 말란 법 있냐? 특히 너처럼 꽉 막힌 애는 농담 좀 할 줄 알아야 돼'
--- 본문 중에서
누군가가, 아마 의료진 중의 한 사람이, 그의 뜬 눈을 감기고 투명한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시신이 옮겨지고 모여든 회사 사람들과 어른들이 장례절차를 의논하는 걸 들으면서 영묘는 경호가 왜 A병원이 아니라 S병원으로 옮겨졌는지 알게 되었다. 시설 좋기로 알려진 영안실 때문이었구나, 그걸 깨닫자 경호의 죽음은 그의 내부에서 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착착 오차없이 계획되어 온 것처럼 느껴졌다.
--- p.207
'넌 참 좋겠다. 넌 아마 하고 싶은 말을 참은 적도, 생각에 없는 말을 꾸며댄 적도 없을 거야. 너한테 하나 묻고 싶은게 있는데 의사가 환자한테 바른말을 못하는 고민에 대해서 넌 어떻게 생각하니? 이를테면 조기 발견 못한 암으로 시한부인 환자에게 외국 같으면 당연히 당사자에게 알릴것을 우리는 보호자에게 먼저 통고를 하고 보호자는 거의가 다 환자에게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 다들 왜 그렇게 속이려 드는지 모르겠어.---중략 이런 거짓말을 강요당할 때처럼 의사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낀 적도 없다니까.'

'애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그래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 의사라고 농담하지 말란 법 있냐? 특히 너처험 꽉 막힌 애는 농담 좀 할 줄 알아야 돼'
---p.141-142
내가 좋아하는 어느 불문학자의 글에서 읽은 건데 불란서 사람들은 해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무렵을 개와 늑대사이의 시간이라고 한대. 멋있지?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낯설어 보이는 섬뜩한 시간이라는 뜻이라나봐. 나는 그 반대야. 낯설고 적대적이던 사물들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고 친숙해지는 게 바로 이 시간이야. 그렇게 반대로 생각해도 나는 그 말이 좋아. 빛속에 명료하게 드러난 바깥세상은 사실 나에겐 맨날맨날 낯설어. 너무 사나워서 겁도 나구, 나한테 적의를 품고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 괜히 긴장하는 게 피곤하기도 하구.
--- p.97,1-10
'내 편지 때문에 그 모든일을 차곡차곡 꾸민거야? 그렇다면 미안해'

'우린한가족이야'

'형은 가족의 이름으로 얽매이는걸 젤 혐오했잖아? 가족으로 부터 자유로워 지려고 미국으로 뜬거 아니었어?...
--- p.300 형제의 대화 중에서
'나는 그냥 되는 대로 반찬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입맛을 형성한 기기의 맛을 흉내내고 있는 거였다.'

'모호하던 것이 그 실제를 드러내기 직전의 긴장감은 짜릿한 쾌감에 가깝다.'

'그가 가장 마음 편하게 의지하고 있는 가족이란 제도 속에 숨겨진 추악한 아우성에 그는 벌집을 잘못 건드린 아이처럼 놀라 자빠질 것 같았다.'

'왜 행복의 절정엔 비극이 스며있기 마련이란는 걸 몰랐을까?'

'사람은 태어날때 비슷하게 벌거벗고 순진무구하게 태어나지만 ,죽을때는 천태만상 제각기 다르게 죽는다.'

'이 세상에 안 죽을 사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죽을때는 자기만 죽는 것처럼 억울해 하는건 이런 불공평 때문일까.무도 없는 무,호기심조차 거부하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이 세상에 깊이 생각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p.
그런데 난 당신같이 좋은 여자 만나 배운거 없이도 집 장만하고 사장 소리까지 들었잖아. 난 해낸 거야. 우리 아버지가 못해낸 걸 난 해냈어. 그만하면 이 세상에 와서 할 도리 다한 거라고 생각해. 가게하고 집만 있으면 당신 혼자서도 우리 아이들 왕자나 공주 부럽지 않게 키울 수 있을거야. 부탁해. 이만하면 할 도리 다하고 간다고 칭찬해 주길 바래.

당신의 남편 치킨 박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 p.310
그런 수경이를 보면서 난 무지 헷갈렸어. 그 부덕한 짓을 보면서 처음으로 너와 나의 관계를 도덕적인 눈으로 보게 됐으니 신기하잖아. 생전 처음 느껴보는 느낌이었어. 처음 결혼을 돈 때문에 한 것 말고는 끌리는 남자하고 자는 데 나는 아무런 꺼리낌이 없었거든. 돈도 나를 움직일 수 없고 도덕적인 비난 같은건 안중에도 없고, 난 그게 내가 도달한 최고의 겅지, 자유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구.

그 착한 여자에게서 남편을 빼앗는 건 옳지 못한짓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 있지. 남자 여자가 서로 원하면 그만이지 거기에 옳고 그름의 잣대가 왜 필요하냐구? 그건 공자님이라 해도 도덕의 잣대로 재서는 안되는 비경 아닌가. 근데 엉뚱하게도 가장 부도덕한 짓거리를 보고 나서 내 도덕심이 움직였으니 헷갈리지 않고 배겨.
--- p.275-276
그러다가도 문득 할머니를 위해서라는 건 자기 기만일 뿐,이 고여 있는 시간속에 뱀눈처럼 숨어 있는 건, 이 저택과 조 단위의 재산을 노리는 욕망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영묘는 아직도 그 욕망을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걸 간단히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었다.

송회장이 못박았듯이 그걸 포기하는 건 바보 짓이다. 그러나 바보 짓을 안 하려니까 자신이 서서히 박제가 되어가고 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지는 건 또 어떡하나. 살아있는 채로 생기는 야금야금 증발하고 꺼풀만 반듯하게 보존되는 과정이, 영묘가 느끼는 오늘이 어제와 다른 유일한 변화였다. 이 젊은 나이에 자신이 박제가 돼버리도록 내버려두는거야말로 정말 바보짓이 아닐까. 어떤 게 진짜 바보 짓인지 알아야 한다.
--- p.238
'그때의 각오나 심정 같은 건 다 잊어버렸지만, 마침내 한국적 상황에서 놓여났다는 황홀한 자유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한데 그게 그런거였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네가 그렇게 말하니 슬그머니 억울해지려고 한다. 그 동안 난 한번도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적이 없었거든. 그건 가족이 구속이 됐다는 뜻이 아니라 힘이 됐다는 뜻이야. 가족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했다면 무슨수로 살아남았겠냐. 그건 나만이 아니라 다들 그래...... 한국 사람이 왜 박사학위도 빨리 따고, 돈도 억척스럽게 벌수 있는 줄 아냐. 가족한테 보답하려고 자랑하려고 그럴 수 있는거야.'
--- p.302
그는 베란다 쪽에 있는 광에 가서 지적한 술을 찾아 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푸성귀도 다듬게 하고 김도 쟁이게 하는 등 뭐든지 부려먹지 못해하더니 그가 그런 일을 통 안 해봤다고 늘 지쳐 있다는 걸 눈치채고부터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식사하기 전에 그녀를 안아본 건 처음날 말고는 다시는 못해 봤다. 그녀는 마치 그들이 만나는 주목적은 한 끼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고, 섹스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후식밖에 안 되는 것처럼 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하여..... 술잔을 부딪히며 현금이 하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왜 한숨 자두지 않구.....'
--- p. 68
그 동안 한 번도 난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적이 없었거든. 그건 가족이 구속 됐다는 뜻이 아니라 힘이 됐다는 뜻이야.가족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했다면 무슨 수로 살아남았겠냐.....나 내자식은 일부러 그렇게 안길렀다.가족들로부터 힘받지 않고도 능히 살아남을수 있도록 강하고 고독하게 키웠지....엄마가 집에서 기다려주지않으면 백점 받은 시험지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초등학생과 다를바 없어.p300-301

내 앞에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이 현실에서 내가 도망가 봐야 얼마나 멀리 갈수 있을까. 육중한 것일수록 인력이 세다는걸 그는 몸 전체로 느낀다.p277
--- p.300-301
경호의 퇴원은 축제처럼 번잡스러웠다. 회사에서 경호의 동료뿐만 아니라 중역가지 동원돼 이리저리 부산을 떨면서 짐을 나르고 퇴원수속을 하는 걸 영묘는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퇴원하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여러 사람이 제각기 날칠 거리가 있다는 걸 획인하면서 통증 하나 없이 사지를 절단당한 것처럼 억울한 무력감에 빠졌다.
--- p.164
같다는 아내의 찬탄은 질투일지언정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만족해서 남편 잘 만나 사랑받고 고생 모르니 늙을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흐뭇해했다. 엽엽한 어머니지만 너무 만족한 나머지 그게 결혼하고 이날 입때 맞벌이로 바스라진 며느리 마음을 상하게 하고, 아들 입자을 난처하게 할 수도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못 미친 듯했다.

아내의 눈흘김에도 불구하고 영빈도 기분이 좋았다. 영묘의 이상한 시집살이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영빈은 이제야 말로 얘들이 사는가 싶게 사는구나, 부럽고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아내는 영묘를 처녀 같다고 했지만 남자와 여자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처녀 총각 때가 아니라 관능의 유열이 절정에 올라 서로에게, 그리고 사는 맛에 가장 탐욕스러워진 청춘의 절정기라는 걸 그 두 사람은 시위하듯이 보여 주고 있다.
--- p.112
'~다들 왜 그렇게 속이려 드는지 모르겠어.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생각해봐. 사람이란 거의 다 속아 사는거 아니니? 사랑에 속고, 시대에 속고, 이상에 속고... 일생 속아 산 것도 분한데 죽을 때까지 기만을 당해야 옳겠냐? 이런 거짓말을 강요당할 때처럼 의사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낌 적도 없다니까.'

'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 그래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 의사라고 농담하지 말란 법 있냐? 특히 너처럼 꽉 막힌 애는 농담 좀 할 줄 알아야 돼'
--- p.142
'~다들 왜 그렇게 속이려 드는지 모르겠어.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생각해봐. 사람이란 거의 다 속아 사는거 아니니? 사랑에 속고, 시대에 속고, 이상에 속고... 일생 속아 산 것도 분한데 죽을 때까지 기만을 당해야 옳겠냐? 이런 거짓말을 강요당할 때처럼 의사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낌 적도 없다니까.'

'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 그래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 의사라고 농담하지 말란 법 있냐? 특히 너처럼 꽉 막힌 애는 농담 좀 할 줄 알아야 돼'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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