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때로 우리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목욕탕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 아빠도 엄마도 함께 있는데 외톨이라고 느끼던 그 어린 날의 마음이 밤이 가진 본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밤은 싫든 좋든 우리가 혼자임을 깨닫게 한다. 혼자라는 걸 깨달았을 때 맛보는 기분은 그때그때 다르다. 어느 때는 불안하고 초조해져서 미래에 나쁜 일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또 어느 때는 혼자서 어디까지나 걸어갈 수 있을 것처럼 묘하게 기운이 난다. 그리고 어느 때는 바로 전까지 함께 있던 사람이 진심으로 소중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기도 한다.
--- p.12~13, 「일찍이 내게 밤은 없었다」 중에서
밤은 검정이 아니라 잿빛이었다. 잿빛 속에 허허벌판만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인공적인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허허벌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밤의 덩어리 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게르는 보이지 않는데 먼 저편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구름이 잿빛 하늘을 뻗어 나가 반달을 닦아내듯이 흘러갔다. 등 뒤에는 게르가 있지만,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고 인기척도 없다. 지구에 나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외롭지는 않았다. 굉장한 기분이 들었다. 밤이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느껴졌다. 그 생물과 마주한 채 나는 홀로 서 있었다.
--- p.29, 「밤의 민낯을 만나다」 중에서
이윽고 기차가 왔다. 텅텅 빈 기차의 창가 자리에 앉아 역에서 산 커피를 홀짝였다. 짙은 남빛 하늘은 물에 녹인 듯이 천천히 파란빛으로 변했고, 이윽고 저편에서 빛이 보였다. 하늘에 솟구친 기암과 기암 사이사이에서 조용히 빛나던 별이 어째서인지 생각났다. 참 예뻤지 하고 하얘져가는 하늘을 보고 문득 생각했다.
--- p.32, 「두렵지 않은 밤」 중에서
물론 두 사람이 무슨 기도를 올렸는지는 사실 모른다. 이슬람교도의 기도가 그렇게 무언가를 비는 행위인지 아닌지도 잘 모른다. 어쩌면 경전에 나온 말을 읊기만 하는 기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도하는 두 사람이 바라는 것, 혹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그리는 행복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억만장자가 되고 싶다든가 명성을 갖고 싶다든가 하는 엄청나게 큰 바람이 결코 아니고, 차가 갖고 싶다든가 새 텔레비전이 갖고 싶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물욕과도 다른, 지겨울 정도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내일도 반복되길 바란다는, 지극히 소소하고 아주 평범하고 흔한 무엇으로 느껴졌다. 느껴졌다기보다 거의 확신했다.
--- p.138, 「기도하는 마음」 중에서
밤, 모르는 장소를 걷고 있어도 조금도 두렵지 않다. 이건 사랑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곁에서 걷는 사람이 나를 하나도 좋아하지 않아도 밤은 두렵지 않다. 그렇다기보다 만약 혼자 걷고 있다 해도 한창 누군가를 사랑하는 중이라면 두렵지 않다. 이 느낌, 여행지에서 취한 채 걷고 있을 때와 아주 비슷하다. 취했기 때문에 낯선 장소가 두렵지 않다. 어둠이 두렵지 않다. 누가 덮칠지도 모른다든가 들개가 짖을지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들뜬 기분으로 밤 속을 성큼성큼 나아간다. 사랑이라는 것은 술처럼 사람을 들뜨게 한다.
--- p.187, 「사랑이 끝나던 밤」 중에서
아직 낯선 천장과 벽. 열어도 열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박스들. 매트리스가 튀어나온 침대. 연결되지 않은 텔레비전과 비디오. 책이 꽂혀 있지 않은 책장. 식기가 들어있지 않은 찬장. 익숙하지 않은 냄새. 살며시 들려오는 안면도 없는 사람들의 생활 소음.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고 누가 봐도 외톨이라고, 그 불안한 마음이 나에게 알려준다. 쌓여 있는 박스 속 물건은 내 소유물이고 그걸 가지고 계속 이사를 다니고 있지만, 그때만큼은 그것들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 p.197~198, 「그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