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바람도 언젠가는 지나가고 거친 물결도 때가 지나면 잠잠해지는 법. 뭇 생명을 품은 바다가, 목숨을 건 물질이, 사나운 파도 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교훈이었다. 해수욕장에서 장사를 할 때 그녀는 물안경을 머리 위에 얹어놓고 그 속에 돈을 넣어두곤 한다. 내게 인생의 큰 가르침을 전해준 그녀의 머리에 얹힌 물안경이 마치 여왕의 왕관처럼 느껴졌다. 금수저를 물고 세상에 태어난 공주가 아닌, 자신의 몸으로 드센 물살을 가르면서 스스로 여왕이 된, 살아서 여신이 된 여자의 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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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는 긴 세월에 걸쳐 국내외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해온 ‘뮤즈’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때 귀양 온 선비나 파견 관리들부터 최근 제주를 방문한 서양 작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장르를 넘나들면서 해녀들의 애환에 공감하고, 아픔을 위무하고, 해녀의 강인함을 찬미했다. 작가 현기영의 소설, 조각가 이승수의 해녀상, 프랑스작가 르 클레지오의 에세이 등에서 해녀들은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고 재해석되었다. --- p.141
숨을 쉬어야 사람은 산다. 그러나 숨을 쉬면 안 되는 직업군이 있다. 다름 아닌 해녀들이다. 스킨 스쿠버들과는 달리 공기통이나 호흡기 등 기계의 도움 없이 오로지 자기 호흡만으로 물질하는 해녀들에게 ‘숨’ 은 곧 목숨이다. 행여 깊은 바닷속에서 숨을 참지 못하고 ‘물숨’을 쉬면 자칫 죽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물숨’은 해녀들에게는 금기어나 다름없다. --- p.160페이지
가파도에서 사는 71살 해녀의 대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물속에 선 가슴으로 쉬주게.” 가슴으로 숨을 쉰다니? 숨을 참는 것도, 내쉬는 것도 아니고 가슴으로 쉰다니?
25년 동안 가파른 도시 서울의, 전쟁터나 다름없는 언론사에서 일 하면서 회사에서 숨이 막힐 듯한 상사를 만났을 때, 기사가 나간 뒤에 당사자로부터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었을 때, 회사가 부도나 날마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남은 기자들이 더 많은 업무를 떠맡아야 했을 때……. 내놓고 외마디 소리를 지를 수도, 마냥 참을 수만도 없던 그 상황에서 나 역시 가슴으로 숨을 쉰 건 아니었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을’이 ‘갑’의 횡포 앞에서 숨을 멈출 수도, 소리를 내지를 수 도 없는 순간에 가슴으로 숨을 쉬면서 견디는 건 아닐까. --- p.164
테왁을 받은 순간을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하는 이도 있고, 가장 슬픈 순간으로 기억하는 이도 있다. 물질을 하고팠던 이에게는 자격을 인정받은 증표였고, 물질을 싫어하는 이에게는 해녀의 고된 삶으로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저주스런 증표였다.
좋아서 받았든 억지로 받았든 간에 해녀들은 테왁을 무척 소중하게 다룬다. 예전에는 스티로폼 테왁에 검정색 천, 요즈음에는 관에서 보급한 오렌지색 천을 씌우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면 햇빛과 바람에 색 이 바랜다. 해녀 탈의장에서 만난 한 해녀는 집에서 들고 온 조각보로 해진 구멍을 깁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얼마나 진지하고 애틋했던지 테왁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 p.183
고달프고 힘든 물질로 얻은 소득을 교육을 위해 기꺼이 내놓은 해녀들의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제 자식만 잘되기를 바라서 촌지를 건네고 사교육 시장을 키우는 요즈음 ‘잘난 엄마’들과는 달라도 너무나도 다른 제주해녀들. 모두의 자식을 위해 선뜻 자기네 몫을 내놓고, 이웃 자식조차 제 자식처럼 여겨 등록금을 댄 해녀 삼촌들이야말로 진정한 기부자요 선한 투자자일 것이다. --- p.208
그중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 구절은 “우리의 거친 숨비소리마저도 다 전수하겠다” “해녀가 꼭 되지 않아도 좋으니 해녀의 삶을, 해녀의 문화를 잘 배우고 익혀서 널리 알려달라”는 대목이었다.
미래의 해녀를 양성하는 것이 법환 해녀학교의 목표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해녀가 될 생각도, 될 능력도 없는 나는 적이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교장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부담감은 싹 사라지고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해녀 문화를, 해녀 삼촌들의 삶을 좀 더 깊이 체험하고 알리는 것이야말로 해녀학교의 문을 두드린 나의 목표이자 동기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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