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였다. 여자가 들어갔던 화장실에서 또 다른 여자 두 명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 나왔다. 긴 머리카락에 피를 덮어쓴 채 눈을 뒤집고 바닥에 뒹굴었다. 비명과 거친 날숨이 섞여 기괴한 사운드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수라장이 된 카페 안을 바라보며 남자는 자신의 미간이 미칠 듯이 간지럽다는 것을 느꼈다. 손님들이 비좁은 실내 계단을 통해 1층으로 쏟아지 듯 도망쳤고, 더러는 2층 테라스의 난간을 넘어 바로 길가로 뛰어내렸다. 호기심인지 용감함인지 몇몇 남자가 화장실을 살펴보는 가운데, 점원 중에 한 명이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여자 하나가 비명을 지르다가 컥컥거리며 뒤늦게 외쳤다.
“사람이 터졌어요. 사람이.”
--- p.11
“오늘 개구리알 뿌릴 거라면서.”
“쉿, 여기 아무도 없는 거 맞아?”
김 순경이 들어 있는 칸이 잠겨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는지, 그 둘의 말이 끊어졌다. 몇 초, 1분이나 지났을까 그는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날숨을 뱉어냈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밖에서 나는 소음을 들으려고 노력했다. 발자국 소리가 다시 여럿이 섞여 들어왔을 때, 김 순경은 헛기침을 하며 화장실 칸에서 나왔다. 양복을 입은 사람 둘이 소변기에 붙어 있었다. 그는 목소리들의 주인을 찾으려고 휘파람을 불며 두 개의 라인을 돌아보았다. 세면기 앞에 붙어 있는 거울을 통해서 본 화장실 실내에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없었다. 옆자리에서 손을 씻으며 아는 사이인지 양복쟁이 둘이 대화를 나누었다. 경찰인 걸 보고도 평온하게 눈인사를 보냈다.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 풀 뜯는 동물들의 온순하고 낙관적인 눈빛이었다.
--- p.111
여자가 입술을 달싹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했지만 잘 들리지가 않았다. 투명한 말뭉치 하나씩이 바닥으로 톡톡 떨어지는 것이 김시오의 눈에 보이는 듯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꺽꺽거리는 울음으로 바뀌면서 그 말뭉치는 덩어리가 조금씩 커졌고 이내 김시오의 귀에도 들리게 되었다.
“죽여버리고 싶어요. 그 새끼들 모두. 다, 죽여버리고 싶다구요.”
들썩이는 어깨, 요동치는 몸과 울음을 삼키는 원한. 김시오는 지금껏 무수히 같은 모습들을 보아왔다. 어머니가 아니면 아버지, 때로는 부모가 버린 아이를 홀로 키운 할머니가 어깨를 들썩이며 그런 울음을 울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은 인간들만이 쏟아낼 수 있는 울음은 어딘가 고래의 초음파와도 닮은 곳이 있었다. 같은 주파수대를 쓰지 않으면 주변의 어떤 생물도 그 울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모두 죽여 버리고 싶다.
--- pp.128-129
“숫자 조절을 잘해야죠.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양을 늘리는 것뿐이에요. 인간은 자신에게 직접 일어나지 않는 일들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요. 아시잖습니까. 이번 건 이후에 한 템포 쉬어가죠. 다른 사건들이 또 사건들을 덮을 테니까. 터지기 시작하면 엔터 쪽을 통해서 기자들에게 마약 리스트 한번 돌리세요.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고, 사건은 모래처럼 사건을 덮을 테니. 그때쯤이면 여기 형제님들의 고통은 아마 석탄기 화석보다도 오래전 일이 되어 있을 겁니다. 아, 그리고 집사님. 우리는 눈 먼 복수를 하지 않습니다. 터질 만한 사람들이 터지는 겁니다. 사실 마지막 구원의 기회는 주는 거죠.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허위의식이나, 신 따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망상, 돼지처럼 처먹으면서도 살을 빼야겠다는 욕망이 없는 자들은 죽지 않을 겁니다. 시오도 그 점은 이해한 거니까. 하나 더 있네요. 이미 죽은 사람들은 터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 pp.168-169
“결론은 정해져 있어. 그 아이 어머니께서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아니, 법이 있고 재판이 있는데 그냥 죽이는 게 말이 됩니까.”
“법이라. 그 어머니가 법이지. 넌 선택만 해. 더 말하면 시끄럽기만 한 네놈의 혀를 뽑고 마저 이야기할 테니까.”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바퀴가 달린 선반을 가져왔다. 러그가 깔린 바닥에 구르는 바퀴의 진동이 느껴질 만큼 수레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눈을 내려서 봐봐. 아, 조금 더 올려야 보이겠군.”
전동모터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장현철의 눈높이까지 테이블의 상판이 올라왔다. 반짝반짝 잘 닦인 스테인리스가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위에는 네일건과 하얀 약통이 하나 있었다.
“하나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는 거야. 대신 다 죽기 전에 누군가 너를 구하러 올 가능성도 있지, 어쨌거나 조금 더 오래 사는 쪽. 이쪽은 고통은 없지만 바로 죽어, 단 네 사체를 아무도 찾지 못하게 될 거야.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야, 야 이 미친 새끼야. 선택 안 해, 내가 너, 너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장현철은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는 걸 보다가 순간 의식을 잃었다. 깊은 수렁으로 정신이 빠져드는 느낌이었지만 어쩐지 평안한 느낌까지 들었다.
--- p.242
‘듣기만 해. 조 반장 팀 교도소로 바로 보냈다. 형우 너도 이 판에서 빠지면 안 되지. 구경꾼들은 썩은 고기만 먹어야 하거든. 지금 바로 실탄 챙겨서 형제원으로 가. 의경 한 소대 달고 가서 싹 다 털어. 제일 중요한 건 거기 원장, 그놈을 잡아. 그놈만 잡으면 경장 정도는 뛰어넘는 거다.’
세상은 칠흑 같았다. 다행히 건너편에서 오는 차들은 없었다. 김 순경은 형제원 입구 다리를 건너며 전조등을 껐다. 5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관용 승합차가 따라오고 있어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20대의 건장한 사내들이 3단봉과 가스총을 들고 호위하고 있었다. 운전병에게 전조등을 끄라고 무전을 쳤다. 이대로 메인 게이트 앞까지 바로 달려들어 거기서부터 치고 올라갈 계획이었다.
김 순경은 차를 세웠다. 주차장 진입로의 자갈들이 바글거리는 소리가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뒤이어 승합차가 따라붙었다. 보안등을 밝히고 있는 초소는 마치 어둠 속에서 혼자 떠 있는 섬처럼 보였다. 뒤편으로 시커먼 산세가 그들을 덮칠 듯 내려다보았다. 계곡의 물소리가 잔잔하였다. 초소에서 보안요원 두 명이 길을 막아섰다. 그들은 대낮에 만났을 때보다 더 거대해 보였다.
---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