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우리는 은연중에 기쁨놀이를 하면서 시련이나 역경을 이겨왔다. 긍정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해야 할 이유를 찾아내고야 만다.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은 기쁨놀이의 정수들을 속담으로 갈무리해 두기도 했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산다.”
“인생사 새옹지마!”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
“…….”
영어로도 운치를 더하는 격언이 있다.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모든 구름엔 은빛 테두리가 있다)
구름 뒤에는 언제나 은빛 찬란한 희망이 숨어 있다는 뜻이니, 부정 뒤에 숨겨진 긍정의 발굴이라 할까. […]
기쁨놀이를 약간 다른 각도에서 이름 붙이면 ‘희망놀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강조점이 조금 다를 뿐,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의 이유 대신에 희망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희망놀이는 생존의 탈출구가 될 수 있다.
성공회대 신영복 석좌교수는 ‘희망놀이’로 20년 감옥생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교도소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보도가 안 되지만요. […] 제가 무기징역 받고 추운 독방에 앉아 있을 때, 왜 자살하지 않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심각하게 고민했었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거든요.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 햇빛 때문에 안 죽었어요. 그때 있었던 방이 북서향인데, 2시간쯤 햇빛이 들어와요. 가장 햇빛이 클 때가 신문지 펼쳤을 때 정도구요. 햇빛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내일 햇빛을 기다리고 싶어 안 죽었어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비록 20년의 감옥이 삶 속에 있지만 결코 손해는 아니다. 태어나지 않은 것과 비교한다면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매일 2시간쯤 들어오는 무릎 면적의 햇빛!
희망을 모르는 이에게는 죽음의 이유가 되고도 남는 지독스런 결핍이다.
하지만 희망을 아는 이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충분한 명분인 것이다. --- ‘네게 희망이 오고 있다-희망놀이 한번’ 중에서
▶ 꿈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뚜렷한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에 그냥 헤매면서 아무렇게나 살 수밖에 없다. 반면에, 꿈을 가지면 목표만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의 관심에서 잡다한 잔가지를 쳐준다. […]
이는 꼭 미사일이나 내비게이션이 목표에 이르는 과정과 비슷하다. 목표추적장치라 할까? 어떻게 부르건, 우리가 꿈을 품을 때, 꿈은 이처럼 우리 안의 목표추적장치를 작동시켜 결국 원하는 목표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도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희망이나 꿈이 있다.
선명한 희망, 목표가 뚜렷한 꿈! […]
선명하고 요지부동인 희망은 닻과 같이 작동된다. 이런 희망은 그냥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이 아니다. 내비게이션은 가다가 딴 데로 갈 수도, 엉뚱한 데로 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닻은 뭔가? 닻은 이미 목표지점에 고정되어 있다. 희망을 품은 사람과 이 닻 사이에는 밧줄로 이어져 있다.
닻과 밧줄은 한 몸체다. […]
희망이 닻이요 밧줄이라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줄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되는 것! 하여간 방향은 모른다. 그런데 눈 감고 당겨도 우리의 최종목표인 닻이 이미 박혀 있기에 상관없다. 우리의 희망은 이런 것이다. --- ‘희망은 명중한다-추적의 법칙’ 중에서
▶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은 모든 인간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신적인 힘’이다”라고 정의했다. 이는 우리의 꿈속에 신적인 창조력이 깃들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엄청난 얘기다. 우주만상을 창조한 신의 창조력을 인간이 꿈이라는 방식으로 지니고 있다니… 그렇다면 꿈을 가진 자는 이미 신적인 잠재력을 작동시키고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
이 놀라운 비밀을 알았던 것일까. 월트 디즈니는 이렇게 말했다.
“꿈꾸는 것이 가능하면 그 꿈을 실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는 디즈니랜드를 세움으로써 몸소 이를 입증했다. --- ‘희망은 명중한다-바라봄의 법칙’ 중에서
▶ “희망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프랑스의 소설가 콜레트가 한 말이다.
희망은 공짜!
새로울 것이 없는 이 사실을 우리는 감쪽같이 모르는 척 하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마치 희망의 가격이 억만금이라도 되는 듯이 희망의 진열장 앞을 서성이며 선뜻 집어 들지 못했다. 감히 손에 쥐어 보고서도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그만 내려놓기 일쑤였다.
희망은 자본이 들지 않는다.
무일푼으로도 ‘희망사업’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잘 되면 대박, 밑져야 본전!
돈이 없다고 변명하지 마라, 희망은 공짜다.
배경이 없다고 핑계대지 마라, 희망의 해는 공평하게 비춘다.
시간이 없다고 넋두리하지 마라, 희망은 무한에 열려있다.
---본문 중에서
아무리 눈앞이 칠흑이어도, 희망은 기어코 귀환한다.
「희망의 귀환」은 철석같은 약속이다.
희망이 돌아온다? 그렇다. 목적을 성취하고 장하게 귀환한다. 일단 끝까지 믿어주면, 희망은 자신의 미션을 수행한 후 승리의 깃발을 들고 개선한다.
희망이 돌아온다? 맞다. 행복 찾아 집 떠난 파랑새처럼 여지없이 귀환한다. 입때껏 밖에서 행복의 꼬투리를 찾아 헤매던 궤적에서 선회하여, 이윽고 희망은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희망이 돌아온다? 옳다.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 속에서 어김없이 귀환한다. 이름하여 변증법적 순환 안에서 희망의 귀환이다. 꼭 누구의 이론이랄 것 없이,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 희망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새희망으로, 새희망에서 새절망으로, 새절망에서 새새희망으로….
이런 줄도 모르고 아직도 휘청거리며 유랑하는 이들에게 괴테는 〈경고〉를 보낸다.
어디까지 방황하며 멀리 가려느냐?
보아라, 좋은 것은 여기 가까이 있다.
행복을 잡는 방법을 알아두어라.
행복이란 언제나 네 곁에 있다.
‘경고’라 이름 붙였으되, 한 인생 베테랑의 독백이다. 행복을 겨냥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와 얽힌 모든 가치 군락에 유효한 진술이다. 홀연, 뇌리가 환해진다.
「희망의 귀환」은 필연이다.
희망을 부르라. 희망은 네게 온다.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