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현실을 가상으로 모사하고 모사된 가상현실을 파악하는 데 개입하는 특정한 시각은 교육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객관적인 것으로 각인된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자유롭게 형성된 시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데올로기적 장치 속에서 길러진 시각이 내면화된 결과다. 더구나 이 시각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효과적으로 부응하는 것이라면 기존 지배 체제는 더욱 공고하게 유지될 것이다.
따라서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주체는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얽매이고 종속된 주체일 수 있다. 또한 반복되는 가상현실 경험을 통해 기존 체제의 유지와 지배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기여할 수도 있다. 가상현실 또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도구로 활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그 속에서 인간은 여전히 종속적인 주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p. 117
가상현실에 들어가는 주체는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며 중심에 설 수 있다. 가상현실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은 주체를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주체의 움직임에 따라서 변화한다. 이를 통해 가상현실에서 주체는 프로그램 자체와 동일화됨으로써 새로운 존재의미를 갖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ID나 캐릭터 또는 가상인간의 배후에 있는 현실 주체의 개념도 의미 변화를 겪는다. 주체가 실체라는 개념은 이미 근대성에 대한 논의에서도 거부되었다. 주체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르게 규정되는 사회적 존재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이 주체는 개인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역사적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주체가 현실 세계에서 규정되는 존재인데 그 현실세계라는 것이 실상은 허구라는 가정은 근대철학이 전제하는 주체 개념에 대한 명시적 비판으로 발전하며 미리 가정하는 주체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주체, 구성되는 주체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킨다.
--- p.124-125
가상세계를 구성하는 이미지는 가상세계의 주체를 해체하거나 재구성하면서 복잡하고 역설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먼저 주체의 해체에 대해 생각해보자.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 속에서 인식하거나 인식되는 모든 것들은 실재에서 파생된, 그러나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모사물, 곧 시뮬라크르들이며, 이 속에서는 더 이상 실재하는 것은 없게 된다. 따라서 이미지뿐인 가상세계에 주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게 된다.
경험되는 것은 오직 실재보다 더욱 실재적인 이미지들일 뿐이며, 경험하는 자신 또한 이러한 이미지들로 포장되는 그 무엇이 된다.
더 이상 인식하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되는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주체라고 생각하는 주체의 시뮬라크르와 경험되는 대상의 시뮬라크르뿐이다. 이처럼 대량 복제 매체들은 주체의 해체를 진행시키는데, 가상현실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가속화 시킨다. 가상현실은 기존의 대량 복제 매체들과 달리 영화의 줄거리 속에 직접 들어가는 적극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더욱이 이러한 체험은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다. '나'는 언제든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주체의 해체가 가속화된다.
이렇게 체험되는 시간은 현실 시간의 흐름과는 별개의 것으로, 가상현실이 주는 경험의 시간이다. 현실에서의 주체는 시간성을 벗어날 수 없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반드시 소진되기 마련이지만, 가상현실의 세계에서는 언제든지 같은 모습으로 같은 경험을 무한히 반복할 수 있다. 그러는 가운데 주체는 역사 발전 과정을 망각하기도 하고, 발전과 변화의 가능성을 상실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주체의 해체가 이루어진다.
---pp.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