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현장에 나가본 시나리오 작가는 안다. 자신이 무심코 써넣은 단 한 줄의 지문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엄청난 중노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자책감 때문에 가슴이 쫄아든다. 시나리오는 최대한 경제적으로 씌어져야 한다. 액수의 문제가 아니다. 불필요한 혼란과 노동을 야기하지 않으려면 건축물의 설계도면을 방불케 할 만큼 냉정하고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시나리오다.
--- <1. 시나리오를 다시 정의하라> 중에서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어떤 내용인지를 5분 안에 설명하는 것, 그것이 피칭(pitching)이다. 누구에게? 물론 그 시나리오를 구입하거나 채택할 수도 있을 만한 제작자나 감독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세일즈 기술이다. 당신은 자신이 만든 상품(시나리오)을 소비자(제작자나 감독)에게 팔아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상품의 핵심적인 내용에 대한 정확한 소개, 소비자가 그것을 구입했을 때 얻게 되는 구체적 이익에 대한 비전의 제시, 그리고 순식간에 상대방의 혼을 쏙 빼어놓을 만한 멋진 화술.
--- <3. 단번에 스트라이트를 던져라> 중에서
<해피엔드>에서 사용된 일련의 보물찾기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분유통에 들어있는 개미'이다. 서민기(최민식)가 자신의 딸에게 분유를 먹이려다가 분유통에 들어 있는 개미들을 발견하는 것은 영화의 초반부다. 이때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냥 스쳐 지나가듯' 이 장면을 보여준다. 이 장면이 다시 반복되면서 '치명적인' 역할을 해내는 것은 영화의 후반부다. 집 앞까지 찾아온 정부를 뿌리치지 못해 자신의 딸에게 수면제를 탄 분유를 먹이며 울먹이던 최보라(전도연)를 기억하는가? 이 장면에서도 '분유통에 들어 있는 개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울먹이는 최보라'에 가려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 장면, 서민기가 집에 들어와 열이 펄펄 나는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여지껏 애써 숨겨왔던 장치('분유통에 들어 있는 개미')는 제대로 작동하는 보물이 된다.
<해피엔드>의 슈팅스크립트와 녹음대본은 다르다. 하지만 두 개의 시나리오 모두에서 서민기가 열이 펄펄 나는 아이와 개미가 들어 있는 분유통을 발견하는 이 장면은 '결정적'인 분수령이 된다. "그래, 네가 바람 피우는 것까지는 좋아! 하지만 남자에 미쳐서 지 새끼 마실 분유에 개미가 들어 있는 것도 몰라? 이런 죽일 년!" <해피 엔드>는 첫번째 개미와 두 번째 개미 사이에 훗날을 예고하는 듯한 대사도 하나 숨겨놓았다. 서민기는 최보라의 불륜 사실을 확인했으나, 최보라는 남편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당시의 장면이다. 가정으로 돌아오려고 애쓰는 최보라에게 서민기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한다. "난 그저 당신이 연이의 좋은 엄마였으면 좋겠어." 그런데 이제 두 번째의 개미가 발견되었으니 최보라에게는 도망갈 구멍이 없다. 솜씨 좋게 배치되어 있는 씨뿌리기와 거둬들이기의 예다.
--- <22. 힘겹고 즐거운 보물찾기> 중에서
로버트 맥기는 말한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 나는 말한다. "초고는 버리려고 쓴다." 하지만 쓰레기를 만들고 그것을 버리기 위해서 초고를 쓰는 사람은 없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초고는 대개 쓰레기로 판명되고 만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판명'이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판명하기 위해서도 초고는 대단히 중요하다. 당신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는 그냥 아이디어이일 뿐이다. 먼 곳에 있는 친구보다는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사촌이 낫다. 마찬가지로 머릿속에 있는 빼어난 아이디어보다 시나리오의 형태로 씌어져 있는 허섭한 한 신이 낫다. 아이디어는 아이디어일 뿐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신으로 변환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E. M. 포스터는 말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을 종이 위에 써보기 전에는."
--- <에필로그. 당신의 크레디트를 얻을 때까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