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공중목욕탕 욕조에 앉아 있는데, 서너 살 먹은 아이가 아빠랑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서 모르는 사람인 제 무릎을 아무 거리낌 없이 짚는 거예요. 저쪽에 다녀오면서 또 한 번 그러는데, 그 순간 짜르르 느낌이 왔어요. 아가야, 세상이 너한테 내 무릎 같았으면 좋겠구나, 나는 어른으로서 너에게 그런 벽 같은 존재이면 좋겠고. 그런 마음으로 힘닿는 데까지 젊은 친구들, 마음 아픈 친구들, 소수자들에게 무릎이 되고 싶어요.--- p.34 「심리기획자 이명수」
사람들은 흔히 ‘좌파는 너무 이상적이다, 비판은 옳은데 방법이 틀렸다’고 얘기하며 방관자의 입장에 서요. 그런 핑계로 문제를 피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나쁜 일인지 그때 알게 됐어요. 만약 제가 그때 적극적으로 작은누나를 변호하며 편견과 공포에 맞섰다면 큰누나도 ‘내 동생이 뭐가 잘못됐냐?’며 당당할 수 있었을 테도, 자살도 하지 않았겠죠. 지금도 책임을 느껴죠. 그다음부터는 큰누나 몫까지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하든 더 열심히 해요. 큰누나가 살지 못한 만큼 제가 대신 살아주는 게 죽은 사람에 대한 가장 올바른 추모라고 생각하는 거죠.--- pp.41-42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경신」
어느 날 열두 살짜리 큰애가 여덟 살짜리 동생에게 짜증을 내는데 말투가 딱 제 모습인 거예요. 저의 성향이 아이들에게 유전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애를 혼낼 게 아니고 내가 바뀌어야 하는구나, 내가 바뀌려면 기본적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어야겠구나 생각했죠.--- p.78 「만화가 윤태호」
엄마는 ‘평생 너의 본질을 모르고 살다가 죽었으면 정말 억울했을 것 같다. 네가 커밍아웃해줘서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훨씬 더 친밀한 모자 관계가 돼서 고맙다’고 하셨죠. 뭔가 이상한데 왜 그런지는 몰라서 본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서로 멀리하던 것이 커밍아웃하면서 쫙 풀린 거예요. 사회적으로 커밍아웃한 뒤에는 오히려 활동 영역도 넓어지고 자신감도 생겼어요.--- p.93 「영화감독 김조광수」
배신을 많이 하기도 하고 많이 당하기도 해서 저는 ‘배신의 달인’이에요. 다들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모였다가 엄청난 번뇌를 겪었죠. 그러면서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됐고, 명분으로 만나고 명분으로 헤어지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어요.--- p.120 「고전연구자 고미숙」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운동권이 지리멸렬하게 흩어지는 걸 보고, 제가 정말 부끄러워한 것은 그 부정직함이었어요. (……)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이념이나 주장을 타인에게 강요했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때의 미숙함은 나이를 뺴고는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20대는 혁명적이지만 매우 미숙한 시기거든요. 그걸 깨닫고 삶으로 책임질 수 있는 주장만 하기로 결심했죠.--- p.131 「희망제작소 기획이사 유시주」
우리는 남과 다를까 걱정하고, 외국 애들은 남과 같아질까 걱정하죠. 물론 그림이 되려면 일단 액자 안에 들어가야 해요. 남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성이라는 틀을 갖춰야 하죠. 그러나 액자 안에 들어가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이 아니라 난생처음 본 그림이라는 느낌을 줘야 해요.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액자 만드는 방법만 가르친 게 아닌지 반성하고 있어요.--- p.140 「피아니스트 김대진」
저는 어릴 때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았어요. 1969년 우드스탁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미국 국가를 연주한 걸 보면 폭격 소리와 함께 전쟁의 참상을 표현해요.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던진 거죠. 그걸 보고 이게 록이구나 생각했어요. 인위적으로 ‘나 칼 있어’ 하고 인상 쓰는 게 아니라 지미 헨드릭스 같은 내공이 쌓이면서 남의 우러름을 받으면 그게 카리스마겠죠.--- p.154 「‘시나위’ 기타리스트 신대철」
원래는 제가 위악적이고 공격적인 애였어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르는 게 탄로날까 봐 늘 두려웠죠. 그런데 마흔이 되던 해 인간적으로 저에게 너무 큰 실망을 안겨준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자기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 얘기하며 자기연민에 빠져 변명을 늘어놓는데 그게 딱 제 모습이더라고요. 확 부끄러웠고, 그때부터 되게 많이 달라졌어요. 미안하다고 빨리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다시 찍자고 부탁할 수 있게 됐죠. 부족한 재능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채우면 되고, 감독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듣는 귀라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p.180 「영화감독 변영주」
나이가 들수록 둘째 줄의 의미를 자꾸 생각하게 돼요. 가장 비겁한 게 둘째 줄인데, 기자는 직업적으로 둘째 줄에 설 수밖에 없어요. 첫째 줄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노동 환경과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할 때, 기자는 아무리 훌륭해도 그걸 전하는 둘째 줄밖에 못 되니까요. 남의 삶을 통해 말하는 거간꾼에 불과하죠. 20대 때부터 한열이 형의 삶을 반추하다가 2003년 〈시사매거진 2580〉에서 배달호 열사를 취재하면서 확신을 갖게 됐어요. 내가 첫째 줄에 서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둘째 줄에서는 비겁해지지 말자!--- p.258 「기자 이상호」
비정규직일 때는 아이 낳을 생각을 못했어요. 언제 쫓겨날지 모르니까요. 비혼과 무자녀가 비정규직의 유일한 무기잖아요. 비정규직에서 탈출하려면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아기가 있으면 불가능하죠. 비정규직 양산이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차단하고 인구 재생산을 막는 겁니다. 둘째가 태어나면서는 제가 육아 노동을 열심히 합니다. 그전에는 아내가 오랫동안 혼자 고생했죠. 저도 죄인이라 말하기 뭣하지만, 지식인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 집안일을 안 하고 공부만 하는 거예요.
--- pp.307-309 「오슬로국립대 교수 박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