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새로운 형식의 만남들
최수철이 느닷없이(하긴 그동안 이런 종류의 글을 지속적으로 써 왔으니 무조건 느닷없는 것은 아니로되) 이처럼 압축적이고 산뜻하여 이야기를 읽는 긴장과 교훈적 재미가 살아 있는 소설들을 거느리고 나타날 줄이야! 서두에 언급한 필자의 변화한 문학관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하나의 작은 감동이었다. 이를테면 박상우라는 작가가 주로 어렵고 까다로운 주제의 작품을 쓰다가 <옥탑방>이라는 경쾌하고 재미있는 소설(나중에 그에게 문학상을 준 출판사에서 이 소설의 제목을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고쳤다)을 선보임으로써 더 폭넓은 독자들과 만난 경우와 유사하다 싶었다.
작고 쉬운 것이 그야말로 손쉬운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삶의 여러 굴곡과 단면들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반영하며 그로써 독자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그렇게 새로운 형식의 만남들이 이 책 속에 무려 서른세 번이나 펼쳐져 있다. -중략-
최수철이 새롭게 선택한 '짧은 소설', 흔히 우리는 이것을 '엽편 소설'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물론 작품의 분량에 따라 소설을 분류하는 콩트, 단편, 중편, 장편, 대하소설의 순서에 있어서 그 맨 앞에 놓이도록 짧은 소설 형식이다. 왜 이토록 짧은 엽편 소설이라는 것이 근자의 빈번한 문학 유형으로 떠오르고 있을까.
먼저 작가의 입장에서는 이 호흡이 짧은 글쓰기가 메시지의 단일성을 바탕으로 강력하고 효율적인 의사전달 방식이 된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마른 바닥에 콩튀듯 분주한 세상 가운데서 손쉽고도 효율적인 책읽기의 방식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작가와 독자 양자 모두에게 쓰기와 읽기의 효율성을 공여하는 독서체계가, 오늘날과 같이 문자문화와 인쇄매체를 탈피해가는 시대에 각광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형편 아닌가.
이 짧은 이야기는 또한 문학의 엄숙주의와 미학지상주의를 탈피하여 수용자인 독자의 구체적 삶에 근접한 문학, 그 삶의 핍진한 바닥을 두드려보는 문학에 이르려는 노력이다. 반드시 결정적인 반전이 매설되어야 하는 콩트의 강박감, 예술적 성취를 전제로 한 단편의 강박감 따위로부터 훨씬 자유롭고, 반면에 작고 소박하지만 신선하고 진솔한 삶의 구체성을 흙 속에 묻힌 옥돌을 캐듯 산뜻하게 발굴해내기에 맞춤인 것이다.
저 어지러운 의식의 굴절을 소설 가운데 펼쳐 놓고 마치 자의식의 탐사여행이라도 하듯 이를 차근차근 짚어나가던 작가 최수철이, 이러한 '짧은 소설'을 단행본 한 권 분량으로 썼다는 것이 어찌 우리에게 놀랍지 않겠는가. 만약에 우리가 그를 이 시대의 역량과 비중이 있는 작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의 작품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에게 이러한 창작방식의 변화가 하나의 새로운 시도요 모험이듯이, 동시대의 한국 문학도 이와 같은 다양한 형식 실험을 동원하여 영상문화와 전자매체에 떠밀려가고 있는 독자들을 '구원'하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무의식의 심층을 끌어올려 이를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 펼쳐 놓던 최수철이, 그 발화의 방식을 이처럼 독자친화적으로 바꾼 것은(물론 그의 중심적인 작품세계야 그대로의 의미로 버티고 있는 것이지만), 앞으로 보다 친숙하고 성의 있게 독자들을 만나겠다는 의지의 신호탄에 해당한다.
--- 김종회/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주인공 최관조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인이다. 기존 소설에서 독특한 주제와 인물설정으로 주목받은 최수철의 또다른 면모다.
여의도나 강남의 어느 분주한 빌딩에 들어가 아무나 대고 '최관조'라고 하면 그가 바로 최관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델인 셈이다.
여행사 대리로 근무하는 30대 중반의 주인공은 '관조'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세상을 탐험하듯 관조하는 인물. 현실에 발딪고 있지만, 그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부유하는 현대인의 단면을 대변한다. 또다른 주인공 김공근은 최관조의 친구이자 소설가이다. 최관조와 나란히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주변부 이야기들을 매력있게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수첩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게 되면서 벌어지는 옛 애인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 밤길을 걷다가 뒤따르는 누군가에게 느끼는 공포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웃지 못할 작은 해프닝, 툭 하면 눈물을 보이면서도 왜 우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 한 남자의 이야기, 운전 중에 팔뚝에 적어 놓은 전화번호 때문에 겪게 되는 불쾌한 경험, 술집에서 본 만화영화 톰과 제리를 통해 엿본 우리의 일상과 심리 등 우리 주변에 사소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보이는 이야기들 속에 돋보이는 작가의 날카로운 필치와 심리묘사는 이 책을 읽는 또다른 묘미다.
표제가 된 '모든 신포도 밑에는 여우가 있다'는 번번이 잘못되거나 속상한 일들의 실패 원인을 적당한 구실을 찾는 '자기합리화'에 익숙한 현대인의 단면을 잘 포착하고 있다.
작가 최수철은 인간 심연을 꿰뚫는 통찰력과 풍자로 인간관계가 빚어내는 묘한 갈등과 그로 인해 갖게 되는 현대인의 과대망상, 피해망상과 불안, 고독한 우리들 일상의 단면을 해학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소설가와 이야기는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 특히 최수철과 같이 예술적 변용을 의욕적으로 시도하는 작가의 경우 이야기 보따리를 어떻게 수습하고 관리하며 사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오랜 호기심을 이 작은 이야기 소설집을 통해 어느 정도 풀게 되었다. 각기 독립적이면서도 이어지는 서른세 편의 이야기의 주인공을 회사원과 소설가로 설정학, 그 두 인물을 친구관계로 연결시킨 것도 이야기 보따리를 관리하는 최수철 나름의 방법이리라.
--- 최두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