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구성
제1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7세기)에는 소규모 가족이 개별 세대로 성립했는데 이를 연烟이라 하였고, 생산과 수취의 단위는 취락이었다. 연, 세대복합체, 취락, 읍락, 소국으로 상향하는 제1시대의 사회와 국가는 자연현상이나 동물에서 유추된 종교적 상징으로 통합되었다. 4세기 이후 고구려를 선두 주자로 하여 족장사회의 질서를 율령, 관료제, 불교로 대체하는 국가들이 출현하였다. 이 시기 개별 취락은 아직 신분과 계급을 모르는 공동체사회였으며, 밭농사와 수렵이 경제생활의 주를 이루었다. 이 같은 초기농경사회初期農耕社會는 중국 및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한 가운데 그리스·로마까지 통상로가 이어진 활짝 열린 국제사회이기도 하였다.
제2시대(8∼14세기)에는 생산과 수취의 단위로 정丁이 성립하였는데, 정은 여러 세대가 일정 규모의 경지와 결합한 세대복합체世帶複合體였다. 8세기 초 신라는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이 최초의 토지개혁에서 분배의 단위는 정丁이었다. 정은 일정 규모의 경지와 세대복합체의 결합이다. 신라는 정을 단위로 조와 공물을 수취하였는데, 국가의 지배 단위가 취락에서 정으로 이동한 것은 농업의 발전에 따라 세대복합체의 자립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고려는 이 같은 신라의 체제를 충실히 계승하였다. 제2시대의 농촌은 제1시대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사회였으며, 토지소유를 매개로 한 사적인 계급·신분관계는 발달하지 않았다. 귀족, 관부, 사원에 속한 노비가 있었지만 소수에 머물렀다. 제2시대의 두 왕조는 왕도王都에 집주한 귀족과 중앙군의 공동체가 군현으로 재편성된 제1시대의 읍락이나 소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체제였다. 재분배경제를 영위했으나 체계적이지 못하였으며, 시장은 초보적 수준이었다. 일본과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바뀌긴 했으나 이 시기에 바다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13세기 중반 몽골제국에 복속된 이래 고려의 사회?경제는 크게 변하였다. 무역이 활성화하고, 지역 간의 인구이동이 활발해지고, 농업생산력이 높아졌으며, 농민의 토지에 대한 권리가 강화되었다.
제3시대(15∼19세기)의 조선 왕조는 15세기 중반에 토지와 인구를 따로따로 지배하는 국가체제상의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토지는 양안量案에, 인구는 호적戶籍에 별개의 체계로 등록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2시대의 세대복합체 정丁이 해체되고, 호戶가 성립하였다. 호는 호수戶首의 가족과 그에 예속한 노비로 구성된 인적 결합을 말한다. 정의 해체와 더불어 종래의 공동체사회는 신분제사회로 변환되었다. 유교儒敎를 국시로 삼은 조선 왕조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위계로 짜인 사회질서와 국제관계를 지향하였다. 조선은 명明의 제후국諸侯國으로 자처했으며, 그에 걸맞은 국가체제를 추구하였다. 제2시대까지 열렸던 바다는 굳게 닫혔다. 16세기 말 이후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무역을 중계하는 지경학적地經學的 이점을 누렸으며, 농촌에 정기시定期市가 성립하고, 동전이 유통되었다. 이 단계에 이르러 소규모 가족은 소농小農으로 자립하였다. 17세기 후반 이래 조선의 농촌은 소농사회小農社會로 나아갔고, 경제활동을 둘러싼 생태계는 도작 일변으로 단순화하였다. 나무가 벌채되고 산지가 개간되어 산림이 황폐해졌다. 이는 도작의 생산성을 떨어뜨렸으며, 농촌시장을 위축시켰다. 곡물을 분배하고 환수하는 재분배경제는 서서히 해체되었다. 반상班常의 위계로 통합되어 온 사회질서도 현저하게 이완되었다. 그 와중에 청과 일본을 선두로 한 제국주의시대가 동아시아에 도래하였다. 500년을 지속한 국가체제와 국제질서의 관성에 눌린 조선왕조는 내외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