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토요일)에 쉬는 것은 열심 있는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이는 안식일이 창조의 명령이며(창 2:2-3) 십계명에도 나와 있기 때문이다(출 20:8-11). 마카비 반란 중에 한 신실한 유대인 그룹이 안식일에 자신을 방어하기를 거부하여 결국 모두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마카비1서 1:31-38).
음식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코셔(kosher) 고기만 먹어야 했다. 이 고기는 특정 종류의 짐승들로만 구성되고, 먼저 그 짐승에서 피를 뺀 후 나온 고기였다(참조. 레 11:1-23; 신 14:3-21). 음식법은 다른 짐승, 특별히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된(신 14 : 8) 돼지 사용을 금했다. 유대인들은 비유대인들과 함께 음식 먹기를 거부했다. 이는 자신들이 먹고 있는 고기가 코셔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이것이 아마도 갈 2:11-14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음식 먹는 문제와 관련한 논쟁의 배경일지 모른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음식법 준수를 불법으로 선언하여 열심 있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자초한 것도 이 때문이다(마카비1서 1:62-63).
--- 「2장.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 중에서
첫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라 불리는 책을 보고 몹시 놀랐을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 ‘복음’이란 복음의 메시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 단어 자체는[헬라어 ‘유앙겔리온’(euangelion)] ‘좋은 소식’(good news)을 뜻하며, 그리스-로마 문학에서는 새로운 황제의 등극을 선포하는 데 사용되었다. 유대 문학에서 같은 어원을 지닌 동사[헬라어 ‘유앙겔리조마이’(euangelizomai)]는 야웨가 자기 백성을 구하러 오신다는 소식을 선포할 때 사용되었다(예. 사 40:9; 52:7; 욜 2:32; 나 1:15).
신약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책들에 속하는 바울 서신들 전체에서, ‘복음’이란 명사는 바울과 다른 사람들이 전한 예수의 오심과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메시지를 의미한다(예. 롬 1:1-4, 16; 고전 15:1; 고후 2:12).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라는 동사는 이 메시지를 입으로 전한다고 할 때 사용된다(예. 롬 1:15; 고전 1:17; 9:16).
--- 「3장. 복음서란 무엇인가」 중에서
우리는 한 번에 하나의 복음서만 가지고 사역해야 하는가, 아니면 네 복음서―예를 들면, 오병이어 기사―를 다 가져와 함께 전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아마도 ‘이것들 중에 하나만 써야 한다기보다 모두 써야 한다’가 될 것이다. 우리가 네 편의 복음서를 받았기에(하나의 거대한 복음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개별성을 존중하여 통합하거나 섞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우리는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하고, 하나의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실제로 이것은 각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고 각각의 특성들을 바르게 인식하되, 서로 조명하는 데 유익한지 보기 위해 다른 복음서들을 참조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을 사용했다면, 그 두 복음서는 마가복음에 관한 최초의 해석이 되며 그들이 마가의 자료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아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대개 특정한 복음서를 가지고 그 복음서의 강조점과 주제를 설명하면서 설교하지만, 다른 복음서들에서 얻을 수 있는 특정 구절에 관한 조명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 「5장. 오늘날의 복음서 이해」 중에서
그들은 예수를 재판하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것을 합하여 몇 번의 재판이 진행되었다.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가 성전을 위협하고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한 것이 죄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는 그가 로마에 반역을 꾀했다고 고소하였다. 이 무렵 빌라도는 여러 차례 총독 직분을 잘못 수행하는 바람에 유대인들의 압력에 너무나도 취약해진 상태였다. 복음서들은 그가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죄를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로마에 탄핵을 건의하겠다는 유대 지도자들의 압력에 굴복했다고 말하고 있다. 누가는 빌라도가,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있었으며 이전에는 한 번도 이 유명한 갈릴리 사람을 본 적이 없던 헤롯 안티파스와 상의했고, 그 역시 예수의 유죄를 확신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에게 불리한 명백한 혐의가 있었고(그가 줄곧 ‘하나님 나라’를 전해 왔으므로),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다른 소요들이 일어났다. 그래서 결국 빌라도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했다는 혐의로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허락한다.
--- 「7장. 역사적 예수의 생애」 중에서
마가는 한 이야기를 다른 두 이야기로 감싸는 샌드위치 기법을 자주 쓰고 있다[‘삽입’(intercalation)이라고도 함].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예는 예수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성전에서의 시위 사건 간의 결합일 것이다(11:12-21). 마가가 이 방법을 사용할 때, 독자들은 마가가 두 이야기 사이의 상호 작용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 두 이야기는 서로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는가? 혹은 이런 병렬을 통해 대조하려는 의도는 없는가? 종종 샌드위치의 가운데 부분이 이런 배치를 통해 부각된다.
마가복음 5:21-43과 14:1-11에 나오는 샌드위치를 생각해 보라. 각 구절에서 마가는 이런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 이 기법을 아는 것이 마가가 각 경우에서 강조하는 점들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을 주는가?
--- 「9장. 마가복음」 중에서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 독자들이 복음서들을 서로 비교하여 선호하는 복음서에 점수를 주는 게임을 한다면 마태복음이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독자들은 누가복음의 탕자 비유를 좋아하고 요한복음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라는 말씀은 좋아하지만, 마태복음이 관심을 가지는 율법, 윤리적 제자도, 순종과 심판에 관한 말씀은 힘들어한다. 마태는 당시의 예수를 닮지 않은 느슨한 기독교를 염두에 두고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는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까지 마태복음에 반영했을까? 현대의 다원주의적이고 포용주의적인 포스트모던 문화는 우리가 마태복음에 거부감을 느끼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우리 자신과 시대를 불편하게 하는 성경의 요구를 회피하지 않고, 어떻게 시대가 공감하는 매력적인 방법으로 예수를 전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복음서가 한 권이 아닌 네 권이라는 사실은 다행이다. 하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말씀은 포기하고 좋아하는 말씀만 편애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실 불편한 말씀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야 한다.
--- 「10장. 마태복음」 중에서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을 향한 관심을 강조하며, 그들이 예수의 공동체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부각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여러 곳에서는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와 같이 첨예한 사회, 경제적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복음은 교회들에게 그런 사회적 경계를 넘어서 사회가 ‘아웃사이더’로 간주한 이들을 포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은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부유한 나라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나라의 권한을 빼앗지 않게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 「11장. 누가복음」 중에서
요한복음은 때로 개인의 구원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요한에게 영생은 개개 영혼의 불멸성을 뜻하는 헬라적 사상이 아니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 공유하는 생명을 뜻한다. 영생은 한 목자 아래 있는 양 떼의 일부가 되는 것이며, 참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는 것이다(10, 15장). 포도나무와 목자의 그림은 이스라엘과 관련 있는 구약의 사상이다(예. 시 80편; 사 5장; 겔 34장). 구약은 하나님이 나뉘고 흩어진 그분의 백성을 모으실 날을 고대하고 있으며(예. 겔 36:24), 요한은 예수의 죽음이 바로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는 일’로 보고 다있(11:52; 참조. 12:32). 이것이 영생이다.
--- 「12장. 요한복음」 중에서?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피상적인 관계에 의존하는 현대 교회에 자극을 준다. 함께 의사 결정하는 데 헌신하는 모습(교회의 모습을 묘사한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구절을 주목하라, 1:14; 2:46; 4:24; 5:12)은, 초대교회가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두고 같은 마음에 이르려고 함께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재산을 서로 공유하기까지 헌신하는 모습은, 자신이 가진 것을 더 움켜쥐고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이 가지라고 부추기는 현대 상황에 더욱더 자극이 될 것이다.
--- 「13장. 사도행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