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을 날마다 쉬지 않고 책 생각만 하니, 점점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또렷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타인의 의식하며 살았던 세월의 때가 벗겨지는 느낌도 들었다.
--- p.7, 「프롤로그」중에서
어느 날 소파에서 낮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면서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몰려왔다. 아니, 우울감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커다란 산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랄까? 뭔가 고립된, 알 수 없는 외로움이 휙 스쳐지나갔다
--- p.18~19, 「너무 무서운 인생2막」중에서
옆에 놓아둔 현금통에 엔화가 수북이 쌓이면서 엄청난 성취감이 몰려왔다. 직장 월급이 통장에 숫자로 찍힐 때와 달리, 현금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 주는 등의 현실성 있는 경제행위가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돈의 색깔이 다르게 보였다, 현금 냄새를 맡으니 내 돈이 아닌데도 내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육천 원으로 구두 계약한 최저 시급이 하루 만에 팔천 원으로 올랐다.
--- p.27쪽) _내 인생의 첫 아르바이트」중에서
삼일 정도 강의에 참여하고, 집에 와 혼자 책을 읽는데 가슴도 답답하고 준비과정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느꼈다. ‘이런 데서 사적 친분은 쌓으면 안 되는 건가? 우리 지원자들끼는 경쟁 관계인가?’ 이런 고민을 한 다음 날은 자리에 앉으면서 옆과 앞뒤 지원자 모두를 돌아보며 마구마구 인사를 했다.
--- p.39~40, 「저 분의 직업은 뭘까?」중에서
‘아! 경험과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구나!’ 원고 준비를 위한 매일의 끄적거림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했다. 매일의 평범한 일상도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시연을 위한 과제로 시작한 어설픈 글쓰기였지만 이런 훈련이 언젠가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 놓을 것만 같았다. 생의 시간을 어느 정도 보내고 자신의 의무가 끝나가는 시간 즈음에 우리는 꼭 한번 다시 공부해야 할 것 같다.
--- p.43~44, 「저 분의 직업은 뭘까?」중에서
드디어 관광통역안내사로 홀로서기를 하게 된 날. 버스에서 혼자 마이크를 들고 다국적 손님들 앞에 섰다. 곧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고 나를 뚫어지듯 쳐다보던 큰 눈들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내 소개를 하고 본격적으로 긴장된 마음을 부여잡고 얼마간 멘트를 했는데 갑자기 콧물이 주룩 떨어졌다.
--- p.72, 「무엇이든 다 할 자유 아무것도 안 할 자유」중에서
인도에 왔구나. 내가 그렇게도 궁금해했던 곳, 바로 여기! 도착부터 진을 빼서인지 택시를 타자 갑자기 몸이 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낡은 택시 창문 틈으로 델리의 차가운 밤공기가 쉭쉭 들어왔다. 좋아! 여기서 나를 다시 한번 테스트해보는 거야. 택시 기사의 크고 검은 눈이 끊임없이 힐긋거리며 백미러로 나를 본다. 두려움에 휩싸인 내 가슴속에도 찬바람이 일렁였다.
--- p.121~122, 「델리, 인도의 수도」중에서
낡은 패딩 조끼를 빠르게 벗었다. 그러곤 조끼 안쪽 주머니에 여권, 체크카드 그리고 현금 2백 불을 넣은 다음, 다이소에서 산 반짇고리에서 바늘과 실을 꺼내 빠른 속도로 시침질했다. ‘나, 한국 아줌마라 이 말이지. 가져갈 테면 가져가 봐. 실력파 소매치기가 잔뜩 모였다고 하니 나도 실력을 보여줄 때가 온 거지.’
자리로 돌아오니 그제야 창밖의 아침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 p.135~136, 「타지마할을 품은 도시, 아그라」중에서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엔 이상한 일이 있었다. 커피와 책을 들고 방 앞 나의 테이블에 앉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내 방 건너편 레게 머리 독일 청년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 한국에서 왔다고 했지? 근데 너네는 왜 그렇게 미국한테 의지하고 살지? 언제 미국으로부터 독립할 거야?”
순간 내가 영어를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내 안의 분노 게이지가 쭈욱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마시던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옆집 털복숭이 미국 아저씨 마이클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 침착해야지. 침착해야지.’ 하지만 뭔가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았다.
--- p.201, 「고아, 아무것도 안 할 자유를 찾아서」중에서
출발 전의 두려움과 떨림은 이미 기억 저만치로 밀려났고, 가슴속엔 잊지 못할 추억만이 한 보따리다. 인도 땅 겨우 4분의 1을 봤을 뿐인데도 ‘이제 나 인도 좀 알 것 같아, 인도랑 친하게 지낼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감히 이런 말도 하고 싶어졌다. ‘언젠가 살다가 길을 잃으면 꼭 너를 만나러 다시 올게. 쿵쿵 뛰는 나의 심장 소리를 들으러?.’ 인천공항에 도착해 입국장을 빠져나오니 이혼서류에 도장 찍고 가라며 으름장을 놓던 남편이 저 멀리서 손짓하고 있다. “야호! 나 50대에 인도 배낭여행 갔다 온 여자다, 이거야!”
--- p.217, 「뭄베이, 두 얼굴의 도시」중에서
나이 오십이 되면서, 스멀스멀 다가오는 알 수 없는 나의 결핍을 채워보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두 개의 단어를 갖다 버렸다. 성공 그리고 실패. 내 나이에 이런 것은 이제 필요 없다. 그저 오늘 한 페이지의 역사책을 읽는다. 작은 성취에 크게 만족한다. 세워 놓은 목표가 다른 곳으로 가도, 걸어간 길만큼의 성취는 있다고 믿으며 다시 나의 길로 성큼성큼 나아간다.
--- p.222~223, 「관광 비수기의 자유」중에서
퇴직 후 달콤한 휴식을 누리며 이런 시간이 영원할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그런데 왜 무기력의 늪에 빠져버렸을까. 이 질문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걸어온 10년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 속에서 나도 몰랐던 내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전반전의 인생에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주인공이었고 직업, 결혼, 출산 그리고 육아의 의무까지, 주어진 숙제가 너무 많았다. 어느덧 목표치에 다다랐다고 느끼는 순간, 내게 들이닥친 감정은 오히려 공허함이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따라왔다. 잠시의 휴식기 뒤에 인생의 전환 지점을 갱신기로 재해석하고 나니, 차디찬 땅에 새싹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내가 이토록 잘 보이니 어디로 가야 할지, 가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털고 다시 일어날지를 알 것 같다. 바람이 언제나 잔잔하지는 않겠지만 비바람도 찬바람도 그 뒤에 부는 봄바람도 모두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리라.
--- p.283~284, 「갱년기 아니고 갱신기」중에서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먹고살 만한데 왜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일거릴 찾아다니느냐고. 이 또한 욕망일 수 있으나 나는 여전히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인지 궁금하고 확인해보고 싶다. 주민센터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거나, 지역아동센터에서 아동복지교사로 일하는 지금이나 일에 대한 나의 자세는 언제나 성실하고 진지하다. 나를 필요로 하는 다양한 공간에서 나는 충분히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욕망 앞에서 더이상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내가 행복한 일을 하자고.
--- p.298~290, 「에필로그」중에서
내 앞에 남은 앞으로의 시간이 내게 행복만을 줄 리는 없다. 누구든 원하는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것 같다. 나름 잘 살아낼 것 같은 이 느낌, 이 시간, 이 나이가 참 좋다. 퇴직 후 10년을 좌충우돌하며 여기까지 왔듯이 앞으로도 세상은 내게 새로운 경험을 던져줄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고, 기대와 설렘을 일지 않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나. 내 삶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 나의 미래에 있다고 믿는다. 파도는 잔잔해졌고 나는 젖은 옷을 말리며 천천히 햇빛 속으로, 아주 천천히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 p.291,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