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를 수식하는 표현들이다. 혹시 이 정도가 루이스에 대해 아는 전부라 해도 염려할 것 없다. 이 글을 통해 루이스의 생애와 그의 대표 저작을 일부나마 죽 훑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루이스라는 산을 오르는 데 도움을 주는 짤막한 산행 가이드와 같다. 혹은 루이스라는 주 메뉴에 대한 입맛을 돋우는 애피타이저라고 생각해도 좋다. ---「순전한 그리스도인, C. S. 루이스」중에서
루이스는 기독교 변증가가 하는 일을 ‘영원한 진리를 오늘의 언어로 제시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번역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진행한 변증 활동은 기독교를 현대의 언어로 ‘번역’한 일이라 바꿔 말할 수 있겠다. … 부모나 자식이나 친구나 이웃이나 교사로서 기독교를 어떤 식으로건 번역해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루이스가 알려 주는 지침이 좋은 출발점이 되리라 믿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번역이 필요하다」중에서
덫에 걸린 개의 심정에서 생각해 보자. 개는 지금 덫 때문에 아파서 미칠 노릇이다. 그런데 낯선 사람(덫을 놓은 것도 사람이다!)이 덫에서 구해 주러 왔다고 하자. 어떻게 해야 덫에서 나올 수 있을까? 그 사람을 믿고 발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아마도 덫을 풀기 위해서는 덫에 더 깊이 발을 집어넣어야 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손에 가시가 박힌 경우에는 가시를 빼면서 한 번 확 아파야 그 다음부터 안 아픈 법이다. 물에 몸을 맡겨야 가라앉지 않는다. 길을 잃은 등산객은 길을 아는 사람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산속 깊숙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도 만날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엉터리 같은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상대를 믿는 수밖에 없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얼굴, 목소리, 표정, (개라면) 냄새 등이 근거가 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증거보다 더 많이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기독교를 믿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아이, 개, 등산객과 같다는 믿음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행동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지혜로우시니, 우리에게 전혀 자애롭고 좋아 보이지 않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찾아오는 의심 앞에서」중에서
성경에는 우리의 구원이 ‘넉넉히’ 이루어진다는 장담이 많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자기 손에서 그분의 백성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선포하신다. 시공간의 창조자요 주인이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다.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약속이 시간 속에서 이루어질 때는 우리의 결단과 선택과 인내라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래서 사람이 자신의 지난 일을 돌아보면 쓰러진 자나 서 있는 자나 똑같이 아슬아슬했음을, 간발의 차이로 모든 것이 달라졌음을 깨닫게 된다. ---「아슬아슬한 시간 속에 펼쳐지는 넉넉한 구원」중에서
루이스가 말한 것으로 하루키(와 엠마)의 말을 돌아보자. 하루키도 뭔가 포착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소년기의 동경, 내 안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나 자신의 일부’”라고 부르고 만다.
반면, 루이스는 그것이 “우리 안에서 지금도 찾을 수 있는 머나먼 본향에 대한 갈망”, “우리 각 사람 안에 있는 위로할 길 없는 비밀”이라고 부른다. 너무나 가슴 아리는 비밀이기에 우리는 거기에 “향수Nostalgia, 낭만Romanticism, 청춘Adolescence 같은 이름”을 붙인다며, 그것이 일종의 복수라고 말한다.
---「보바리 부인의 열정과 하루키의 동경이 가리키는 것」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