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유학 시작할 즈음, 하루하루 생존법을 익히느라 문화, 관광에 미처 눈 돌릴 여력이 없었다. 전철 타는 것도 서투른데 숙소 구하러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수퍼마켓에서 물건사기, 학생식당과 도서관 이용법 익히기 등등 모든 일상사가 낯설었다. 소르본느 어학원에 등록하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다 코앞에 와 있는 노트르담을 보았고, 외환은행을 찾다 지쳐 벤치에서 쉬려다 가로수 위로 드러난 에펠탑을 보았더라는 식이다. --- 본문 중에서
오후였고, 어두운 도서관 로비였고, 난 그럭저럭 무료하기도 하였다. 갖가지 공연전시 안내들이 늘어진 게시판을 훑어보다가 ‘나는 너의 피부를 읽는다’ Je lis ta peau 라고 쓰여 있는 심상찮은 브로슈어에 눈이 갔다. 아니, 붉은 금동색 배경에 형광 핑크로 빛나는 글씨의 이미지를 먼저 보았다고 해야 한다. 전단지를 펴보고서 ‘내가 와 있는 곳이 파리구나!’ 실감했다. 그것은 이 도시의 외곽에 있는 한 성당에서 있을 예정인 제니 홀처의 전시를 알리고 있었다. 제니 홀처 Jenny Holzer 라면 전광판 미술로 잘 알려진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작가다.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 꼭대기에 느닷없이 ‘내 욕망에서 나를 지켜줘’Protect me from what I want 라는 메시지를 대문짝만하게 날려서, 휘날리는 자본주의의 망토 아래 넋을 맡긴 채 오늘도 그 욕망을 제 것인 양 살아가는 우리들의 부산한 발걸음을 민망하게 했던 그녀였다. 그녀가 이번엔 ‘너의 피.부.를 내가 읽.는.다.’며 또 한 번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자극하려 드는 것이었다. 상처받기 쉬운 신체의 마지막 외곽인 ‘피부’.그리고 감시와 통제, 귄위의 교묘한 행위인 ‘읽는다.’ 객지에서 만난 그녀가 반갑다. --- 본문 중에서
센 강을 끼고 있는 오스트렐리츠역은 우리로 치면 용산역쯤 되려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기차역 특유의 울림음은 나라마다 다를 게 없다고 느끼며, 난 근처에 있는 생 루이 성당을 찾는다. 무뚝뚝한 느낌의 오래되고 둔중한 성당 문을 밀고 들어서니 미사를 위해, 고해성사를 위해 띄엄띄엄 앉아있는 노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반쯤 누운 가을볕이 그들의 굽은 등을 비춘다. 성당을 전시장으로 선택했다면, 그리고 그녀의 오더독스한 작업경향으로 미루어 본다면 여기지 싶은 곳이 보였다. 풍수로 쳐도 한 가운데고, 거룩한 신성이 바로 당도할 것 같은 원형의 돔, 거기 그녀의 작품이 서 있었다. --- 본문 중에서
예상했었지만 난 잠시 말을 잃었다. 작품은 세로로 솟은 전광탑을 상상하면 될 모습이었다.바닥에서 시작되는 전자 텍스트들은 거대한 말의 기둥이 되어 성당 궁륭의 한가운데를 뚫고 천공으로 빠져나간다(사진3). 정확히 높이 36m, 사방 23m의 스틸 전광판은 성과 죽음, 인류의 폭력성과 광기, 그리고 전쟁에 관한 묵시록적 전자 잠언을 싣고 우주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텍스트의 상승 속도와 내 독해 속도와의 어쩔 수 없는 간극! 끊임없이 솟구치는 텍스트들은 마치 인간이 신에게로 보내는 타전인 것도 같고, 신이 내려 보낸 계시의 번안 같기도 하다. --- 본문 중에서
찬바람 부는 바닷가, 철지난 어느 유원지. 귀에 익은 <페일 블루 아이즈> Pale blue eyes 가 창백하게 흘러나오고, 오랜만에 옛 친구들 셋이 모여 걷는다. 낸과 샤론, 그리고 브루스. 가죽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치며 그럭저럭 걷다가 바다로 트인 난간에 둘은 걸터 앉고, 낸은 그들에게 카메라를 댄다. 재즈바 가수 샤론은 에이즈로 그의 동성 애인을 잃었고, 매니징 에디터로 일하는 브루스는 얼마 전 양성 진단을 받았다. 멀리 수평선을 배경으로 그들의 쓸쓸한 미소가 낸의 카메라에 잡힌다. 이번엔 맞은편에서 셔터를 누르는 낸의 카메라가 비디오 화면에 잡히고, 흐르던 음악이 멈추면서 찰칵! 천천히 화면을 가로지르는 손 글씨는 “내가 너의 거울이 될게” I'll be your mirror 라고 쓴다.
영국 BBC에서 방송된 이 필름은 미국의 사진작가 낸 골딘이 자신의 가까운 친구들을 인터뷰한 8mm 비디오다. 그와 친구들의 사랑과 우정, 추억과 회한을 담담한 내래이션으로 담고 있는 이 필름은 사실 호모 섹슈얼과 헤테로 섹슈얼, 트랜스젠더와 드랙 퀸, 히피와 마약 등 금기와 터부를 관통해 온 그들의 삶의 기록이고, 지난 세기 말 그들을 휩쓸고 간 에이즈의 상흔에 관한 기록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