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이 뭐예요?”
피노키오가 묻고,
“양심이 뭔데요?”
우리도 물었다.
(…)
“사람들이 듣지 않는,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지!”
그렇게 말한 것이 바로 지미니 크리켓, 피노키오 곁에 있는 중절모를 쓴 작은 귀뚜라미였다.
--- pp.7~8
지민이, 지미니, 지미니 크리켓. 나조차도 피노키오가 ‘지미니’라고 귀뚜라미를 부를 때면 나를 부르는 소리 같아 흠칫 놀랐다.
“네가 내 양심이야, 지미니.”
언젠가부터 지호는 자기가 피노키오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고,
“인간이나 돼라.”
나 역시 그 애가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나무 인형인 것처럼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 pp.8~9
그 모든 일이 지나간 후, 일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이날을 돌이켜 보며 경우의 수를 따져 보았다.
붙들거나 말리거나 쫓아가거나. 어느 것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잘해 보려고 했다. 그게 내가 다온의 일에 개입하게 된 이유였다.
--- p.15
‘가해자’인 지호만큼이나 ‘피해자’인 우리하에 대해서도 많은 소문이 떠돌았다. 소름 돋아 하면서, 재미있어 하면서 하는 말들. 남 일이라서, 실감이 나지 않아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들.
‘그런 일 보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더라.’
‘걔도 정상은 아니었대.’
(…)
이제 우리하가 내 얼굴을 똑바로 보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 pp.60~61
말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나는 내 양심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를, 절대 무시하지 않고 듣고 따르려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못 들은 것일까, 나의 양심이 아무 말도 없었던 걸까. 양심조차도 답을 모르는 것일까.
--- p.64
무력하지 않다.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우리는 무력하지 않다.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나는 그 문장을 되새겼다. 얇지만 질긴, 쉽게 구부러지지만 부서지지는 않을, 지팡이처럼 디딜 수 있는 문장이었다.
--- p.93
마음을 놓았다. 안심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너무 생생해서. 익고, 썩고, 쓰러지고, 솟아나는 것들에 시선을 빼앗겨서.
살아 있는 사람의 양감과 온기가 너무나 압도적인 것이어서.
지나간 일들을 그림자처럼 보이게 했다.
--- pp.96~97
리하도 화를 내고 다온도 화를 냈다. 나에게,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내고, 비난했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사람 우습게 만들고 좋았냐고. 나도 말했다. 아무 말이나 했다. 사이렌이 점점 가까워져서 서로의 말이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소리 지르고, 울고, 화를 냈다.
어두웠고, 연기 냄새가 지독했고, 시끄러웠다. 그래서 다른 무엇으로 마음을 누르거나 가릴 필요가 없었다.
--- p.138
세상에 완벽한 사과는, 용서는 없을 것이다. 듣는 사람도 만족하고 하는 사람도 맘 편해지는 그런 완벽한 건 없다. 언제나 여지를 남기고 흔적과 실밥을, 마르지 않은 시멘트 위로 지나간 발자국 같은 흠집을 남긴다.
용서는 약속이 아니다. 결과가 아니다. 기나긴 과정이다. 우리는 그 긴 과정의 문턱을 겨우 넘었을 뿐이었다.
--- pp.159~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