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디야? 사이비 종교 신당인가? 나 혹시 제물로 바쳐지는 거?’ 체리는 잔뜩 긴장했다. “잘 들어라. 이곳으로 말할 것 같으면 조선 왕실을 지키는 신성한 성수청이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성수청 수장인 도무녀이며, 너로 말할 것 같으면 미래국 대한민국에서 조선으로 왔느니라.” ‘뭐, 성수청 도무녀? 내가 조선 시대로 왔다고?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장난하세요? 내가 왜 조선 시대로 와요?” 체리는 까무러칠 듯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도무녀는 못 들은 척 제 말만 할 뿐이었다.
“이에 하늘의 뜻을 알리노니, 아까 그분을 따라가되 누구에게든 미래국 출신임을 발설해선 아니 되느니라.” 체리는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 봤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그럼 꿈이 아니란 건데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헛소리 말고 얼른 풀어 줘요!” “어허! 신성한 성수청에서 어찌 목소리를 높이느냐! 너 스스로 원해서 조선 땅에 떨어졌거늘, 이걸 봐도 모르겠느냐?” 도무녀가 쩌렁쩌렁하게 야단을 치며 작고 네모반듯한 초록색 케이스를 열어 보였다. ‘엇, 저것은!’
--- p.12
잠시 후, 공주 방으로 들어가 마주 앉자 공주가 체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마에서 눈으로, 눈에서 코로, 코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뺨으로 눈길을 옮겨 가면서……. 그러자 윤 상궁이 효연 공주의 손에 붓을 쥐여 주며 말했다. “공주마마, 강 규수에게 뭐든 하명하소서.” 그 말이 신호가 된 듯 공주가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윤 상궁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공주의 눈물을 무명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그제야 공주가 눈물을 그치더니 종이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 힘들게 쓰고 난 후에는 체리가 볼 수 있게 종이를 돌려 놓았다.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대 같은 천하절색 나 같은 천하박색 체리는 어리둥절했다. 공주는 ‘그대 같은 천하절색’이란 글을 짚은 다음 그 손가락으로 체리를 가리키고, ‘나 같은 천하박색’이란 글을 짚고서는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천하절색, 공주가 천하박색이라고? 누구 놀리시남?’ 체리는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셔요? 공주마마님이 천하절색이시지요. 저야말로 천하박색이고…….” 그러자 공주가 체리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팽 돌아앉았다.
--- p.54~55
체리는 공주의 등허리와 어깨를 꼿꼿이 세워 주고 보폭을 좀 큼직하게 잡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게 했다. 공주는 이제야 알아챈 듯 훨씬 안정된 자세로 당당한 걸음걸이를 선보였다. “우아! 공주마마 최고! 이제 제대로 하시는데요? 진짜 멋있고 당당해 보여요. 활기차 보이고요.” “정말? 나 잘했어?” “그렇다니까요. 지금처럼만 하시면 우리 공주마마 조선 최고 가인 되는 건 시간문제예요.” 체리가 칭찬을 한 보따리 늘어놓자 공주가 해맑게 웃었다. “가인은 무슨. 그렇게까지 안 되도 좋아. 강 규수 덕분에 이렇게 살도 통통히 찌고 얼굴도 고와지고 자신감도 생기고. 이것만으로도 행복해. 다 죽어 가던 내가 강 규수 덕분에 살았잖아.” “아닙니다, 제가 되레 공주마마께 감사해요. 아무리 저 혼자 노력해도 마마께서 안 따라와 주셨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니까요.” 정말 지난 한 달은 두 사람에게 참으로 중요한 시간이었다. 반윤곽 화장술이 의외로 잘 어울리자 공주는 체리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체리는 체리대로 힘이 나서 장 나인과 함께 이런저런 화장품도 더 만들어 보고, 화장술도 더 열심히 연구했다.
--- p.101~102
“여기가 조선가인살롱 맞지요?”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시오?” “우리는 청풍루 기녀들이오. 강 규수님을 뵈러 왔소이다.” 체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연화가 어떻게 할지 묻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체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니. 들어오라고 해라.” 곧 연화가 빗장을 풀고 대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마자 예닐곱은 되는 기녀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런데 청풍루 기녀들이 끝이 아니었다. 조선가인살롱에는 연일 여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청풍루와 쌍벽을 이루는 옥영정은 물론 장안의 이름난 기방 기녀들은 죄다 찾아오고, 명문 세도가의 안방 마나님들 모임에서부터 반가 규수들 모임까지 체리를 만나지 못해 안달이었다. 미리 정중히 편지나 사람을 보내 뜻을 묻기도 했지만 청풍루 기녀들처럼 다짜고짜 방문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연히 체리는 모두 다 돌려보냈다.
물론 조선에서 영영 살아야 한다면 조선가인살롱을 키우고 조선 최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는 것도 해 볼 만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몇 달만 있으면 21세기로 반드시 돌아갈 텐데, 그런 처지에 뷰티 강좌며 시 작법 강좌를 어찌 시작하겠나. 그런데 하루는 공주가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내 소문을 듣고 강 규수를 찾는 여인들이 저리 많을진대, 홍익인간 정신을 발휘해 조선의 여인들을 구해 주면 어때? 물론 힘이야 들겠지만.”
--- p.158
갑자기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검은 복면을 쓴 자가 불쑥 나타났다. 체리가 깜짝 놀라자 검은 복면은 쉿, 하면서 입 가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다급히 옥문을 열고 들어와 큰칼을 벗겨 낸 후 체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누구시오?” 체리가 놀라 묻자 검은 복면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진무요. 대군마마께서 하옥되시기 전, 강 규수를 꼭 탈옥시키라고 내게 명하셨소. 어서 여기를 나갑시다.” 복도 끝 옥문을 지키는 옥지기는 진무한테 당한 듯 가슴께가 피로 물든 채 고개를 푹 꺾고 있었다. 둘은 복도와 뒷마당을 지나 담장 쪽으로 갔다.
“내가 위로 올려 줄 테니 담장을 훌떡 뛰어넘으시오.” 진무가 말하는 순간, 갑자기 횃불을 든 옥졸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거기 서랏!” 체리는 진무의 등 뒤로 바짝 붙었고, 진무와 옥졸들은 한바탕 몸싸움을 벌였다. 진무는 옥졸 여럿을 순식간에 해치웠지만 계속해서 몰려드는 옥졸들을 혼자 몸으로는 당해 내지 못했다. 결국 체리는 다시 옥에 갇히고 진무도 잡히고 말았다. 옥졸들에게 끌려가면서 진무는 체리에게 급히 말했다. “미안하오, 일이 이렇게 돼서. 그렇지만 절대로 희망을 잃으시면 아니 되오. 누명을 벗고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대군마마께서 전하라 하셨소.”
---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