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울리고 회전목마가 돌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속도를 올리면서. 손님은 나뿐이었다. 칙칙한 풍경이 뒤로 흘러갔다. 휑하고 썰렁한 그 장소에서, 나와 말은 용감하게 나아갔다. 서 있는 남자를 남겨둔 채.
갑작스러운 해방. 시야에서 남자가 사라진 순간의 홀가분함, 그 고독함. 그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안도감.
그러고 보니 옛날에 부모님과 함께 갔던 놀이공원에서도 회전목마는 나 혼자 탔다. 부모님은 펜스 옆에 서 있었다. 지금 남자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음악이 울리고 목마가 돌기 시작한다. 그 순간에 찾아오는 혼자라는 감각을 나는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자유로움과 신비로움, 불안하면서도 안도하는 느낌. 한 바퀴를 돌아오면, 웃는 아빠와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나도 손을 들어 답했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일 뿐 그들의 모습은 다시 뒤로 사라졌다. 그 순간의 내 얼굴을, 혼자인 동안 지었을 그 표정을 우리 부모님은 물론 모른다.
---「혼자가 될 때」 중에서
어린 시절이란 아주 특별한 것이다. 모든 것이―보고 듣고 만지는 것 모두―하늘에서 내려온다.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건이 아이들 위로 그저 내려온다. 비처럼. 눈처럼. 햇살처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문장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린 시절이 특별한 이유 중에는, 어린아이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말로―후회나 실망, 고독과 애달픔도 그렇다―질서정연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도 하나 있다. 하나의 개념을 말로써 파악하는 것은 아마도 무언가를 현저하게 잃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감정에 이유를 부여해 슬픔을 경감해주기도 한다.
말로 파악할 수 없는 슬픔은 혼란스럽고 무거워서, 정말 골칫덩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얘기를 읽으려면 언제나 조금 두렵다.
---「진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 같은」 중에서
무슨 생각으로 글을 쓰는가, 하고 다그쳐 물으면 어떻게든 그곳에 내 발로 가보고 싶어서,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좀 더 복잡하게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내게는 그곳에 가보는 행위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짧은 이야기라도, 그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나는 거기에 혼자 있다. 지금까지 아무도 온 적 없는 곳, 아무도 본 적 없는 풍경. 그 끝없이 넓은 곳에 덩그러니 서 있고 싶어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서 있고 싶어서지, 거기에 있는 동안은 그럴 여유조차 없다. 전후좌우가 없어, 안 그래도 방향 감각이 없는 나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맨다. 솔직히, 빨리 돌아가고 싶은 오직 그 한 마음으로 걷는다. 어쩌다 내가 이런 곳에 왔을까 하고 단박에 후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다. 헤엄도 치지 못하면서 다이빙을 한 꼴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 발로 걷고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본 것만을 쓰고 싶어 그곳에 가보지 않을 수 없다.
---「왜 쓰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