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을 자던 중 집이 흔들리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눈을 떴다. 일어나보니 마치 영화처럼 집이 기울어져 있었다. 엉망으로 쓰러진 피아노며 가구들을 지나쳐 아이들을 깨우러 가는데 몸이 계속 흔들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 일본 땅에서 우리 가족이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몸이 떨리고 두려움이 솟구쳤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겨우 집에서 나와서 일단 회사로 향했다. 출근길에 본 수많은 건물이 무너지고 금이 가고 파괴되어 있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사망자 약 6,300여 명, 부상자 약 2만 6,800여 명에 2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한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 p.12~13
그 유명한 선언 ‘마누라하고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가 발표되던 순간이었다.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된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
전면적인 체질 개선을 요구하는 방침이었다. 일본을 잘 아는 이건희 회장은 뼈를 깎는 변화만이 일본을 이길 수 있는 방법으로 보았던 것이다. 나중에 내가 질문할 기회가 있었다.
“회장님, 왜 마누라는 빼라고 하셨습니까?”
“마누라를 바꾸기는 너무 힘들어.”
그래서 마누라하고 자식은 놔두고 나머지는 다 바꾸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 p.46
도쿄와 오사카로 대표되는 일본의 지역성, 그러한 극단적인 성향에 대해 일본은 자기 나름대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극단성을 보이되 분열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장점으로 승화시켜서 긍정적인 요소로 받아들인 결과다. 정반대되는 성향을 보이는 지역들이지만 서로에 대해 깔아뭉개거나 깨뜨려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이런 양극단적인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잘해 나간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잘해야 된다.’
--- p.54
일본보다 20~30년 뒤진 후발주자였음에도 열심히 노력한 끝에 비즈니스로 소니를 이긴 삼성 주역의 일원으로서 그 전략 비결을 3가지 정도로 정리해볼까 한다.
첫째, 거짓말하지 말라. 일본인들은 거짓말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하고 서로 간의 말을 그대로 전적으로 믿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으로 쓴 영수증보다 신용카드 전표를 더 신뢰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손으로 쓴 영수증을 더 신뢰할 정도로 자기 행위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둘째, 자기가 책임져야 할 몫을 인정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남들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는 자세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 사고로 사망하는 일을 당하면 “우리 가족이 여기에 와서 죽게 되어 여러분께 폐를 끼쳤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본인들은 사고사에 대해서 자기 자식이 그런 사고가 날 수 있는 곳에 가지 않도록 말리지 않았으며, 조심해서 다니라고 경고하지 않았다는 입장에서 먼저 이야기를 하지, 왜 국가가 지켜주지 않았느냐며 사고사를 국가 책임으로 몰고 가지는 않는다. 이태원 참사나 세월호 참사 사건이 정치적으로 확대될 때, 왜 자기 책임은 빠져 있는지, 형제와 부모도 책임지지 못했는데 왜 국가 책임만 있는지 주장하는지 의문스러웠다.
셋째, 역사, 스포츠, 종교 이야기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양한 주제를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관계로까지 발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역사, 스포츠, 종교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 비즈니스는 거의 100%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 p.55~56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경제의 중심지였던 부산 지역의 경제가 부흥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삼성자동차가 외국 기업에 매각됨으로써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로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마저 꺾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싶다. GM, 포드를 가진 미국이 자동차 사업을 안 놓고 있고, 독일은 폴크스바겐, 벤츠를 가지고 있고, 프랑스는 푸조, 르노를 가지고 있고, 일본도 닛산, 토요타 등 11개의 자동차 회사를 가지고 있다. 영국 경제가 내려앉기 시작한 것은 자동차 산업을 뺏기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자동차 엔진 설계 등의 설계를 쥐고 있어서 명맥은 살아 있다.
--- p.63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눈물인지 땀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힘겹게 108배를 채워 가는데 어느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가슴 속에 응어리처럼 맺혀 있던 서러움이 온몸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창피하다는 생각조차 할 여유도 없이, 나는 엉엉 울면서 108배를 했다.
--- p.88
일본 회사에서는 고위직이라도 회사에서 제공하는 승용차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 많은 임원이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퇴근하고 도시락밥을 먹거나 편의점에서 주문한 간편 식단으로 사무실에서 혼자 식사하는 일이 적지 않다. 철저한 상명하복의 질서를 지키지만 권위주의 문화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1990년대 초, 수면 위로 떠오른 권위주의 폐해를 그 즉시 해결해 지금은 수평적인 임직원 관계를 엄격하게 지킨다. 이른바 ‘갑질 문화’로 대표되는 고질적인 구태와 폐습을 그들은 우리보다 20년 앞서 반성했고 해결했던 것이다.
--- p.97
화를 안 내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어느 날엔가 깊이 생각해보았더니, 내가 가장 믿는 사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가장 화나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다시 또 곰곰이 ‘저 사람이 왜 저렇게 나한테 화를 냈을까? ’ 돌아보았더니, 그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내 잘못이 저 사람을 화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본 사업가들은 회의하다가 싸울 수 있는 일이 생겨도 좀처럼 싸우지 않는다. 우리 같으면 몇 번이나 성질을 버럭 낼 만해도 말이다. 한번은 나이 지긋한 일본 사업가에게 그 이유를 묻자, ‘싸우면 장사의 신(神)이 도망가니까 큰소리를 내면 안 된다. 조용히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화를 내면 모든 좋은 것이 다 도망가니까,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화를 내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이후 나는 화를 내지 않는 인내심을 많이 키울 수 있었다.
--- p.163
자신의 죽음 이후를 스스로 준비해 놓으신 장모님 덕분에 하나뿐인 딸과 사위는 허둥대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장례를 잘 치를 수 있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장모님 유품을 정리하는데, 소지품으로 염주 하나와 단주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나는 장모님이 남긴 단주와 염주를 붙들고 절을 하면서 아이처럼 울었다.
--- p.199
결국 사람의 머리 속에 든 생각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려면 특히 사람 간의 믿음이 필수적이다. 고객이든 거래처 직원이든 그 사람이 오지 않으면 오게끔 하는 일이 사업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한 번은 어떤 대학생이 나에게 ‘믿어도 좋은 사람’들은 어떤 유형인지를 물어왔다. 그 질문을 계기로 신뢰할 만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대략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기본이 안 되어 있다보니 변명을 많이 하고 무엇이든 잘 이루어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말에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고 잘 이러우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말에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고 행동도 동반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약속을 어기면 상대방은 ‘나도 약속을 안 지켜도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고, 이런 생각이 만연해지면 이 세상 질서가 무너질 것이다. 약속은 모든 것의 우선이다.
둘째, 부모님을 존경하는 사람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낳기 위해 피를 한 동이를 쏟아 낸다고 하니, 목숨을 걸고 자식들을 낳으시는 셈이다. 아버지도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당신이 하고 싶은 것들은 하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을 걱정하시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설사 부모님께서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을 조금 하셨다 하더라도, 부모님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존경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주위 분들을 고마워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심지어 청소하시는 분들만 해도 우리한테는 엄청난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렇게 하찮은 일을 그분들이 해주시기 때문에 위생이 유지된다. 그분들이 안 계시면 이 세상이 더러워서 어떻게 살겠는가?
넷째, 핑계를 대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패배의식에 젖어서 ‘누구 때문에 안 된다. 무엇 때문에 안 된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안 되는 이유는 누구든 알 수 있으며 그런 내용으로 서류를 만들면 한 트럭을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안 되는 이유를 말할 필요는 없다.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건데, 그것보다는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한두 페이지라도 이유를 찾고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하다.
다섯째,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선의의 거짓말은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하얀 거짓말’도 거짓말이고, 거짓말을 하는 건 기본이 안 된 것이다.
--- p.218~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