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새 한 마리 날아와 앉고

바람 불어 자두꽃 사태 지고

뒤란에 흩날리는 꽃잎은 자두나무의 것이고

앞마당 싸리비에 쓸려나가는 방심(放心)은

허술한 나의 것이고

이 모든 사태가 균형을 이룰 때까지

멀리서 날아온 새 한 마리는

여전히 멀리서 날아온 새 한 마리로 앉아 있고
---「오후 한때」중에서

국밥 한 그릇 값이면

새벽밥 먹고 나온 더덕 할멈 떨이도 해줄 수 있고

에누리 없이도 얼마든지 웃을 수 있고

속곳 조금 내비친대도 아무도 탓하지 않아

여긴 페미니즘도 없고

셈법도 필요 없어

사람이 먼저거든
---「장날」중에서

수면 위에 퍼지는 동그라미가
파문인 줄 몰랐네

소금쟁이가 물 위에 새겨 놓은
무늬인 줄만 알았네

동그라미가 동그라미를 낳아
파문이 되는 줄 몰랐네

소금쟁이를 살게 하는 힘
파문의 힘

그 파문이, 냇물을,
하류까지 끌고 간다는 걸 알았네
---「파문의 힘」중에서

매듭 없는 소리에 눈 흘기지 마라
그래도 쉼표는 있다

손짓으로 쓰는 문장이
더 간절한

저 몸짓이 시(詩)다
마침표는 생략해도 좋다

아름다운 여백을 가득 채우는
눈빛의 언어

행간이 더 빛나는
문체
---「수화」중에서

어제 경매가를 보면
오늘 경매가를 알 수 있다는데

그건
지극히 인간의 관점

깊은 바닷속에서 놀던 물고기가
갑자기
삶이 무료해질 때

잡혀줄까 말까
고민을 한다

그날의 경매가는
물고기 마음에 달렸다
---「물고기 마음」중에서

너무 아프지 않게
첫눈처럼 왔으면 좋겠어

너무 슬프지 않게
운명처럼 왔으면 좋겠어
---「문자」중에서

원초적 본능 이해해. 탁란하는 습성 탓할 수 없어. 집안 명당 독차지했다고 대신 욕먹고 있어. 그래서 몰염치로 살기로 했어. 빠꾸, 하기로 했어. 어차피 비열한 생존 게임이야. 입 닫고 죽으나 떠들다 죽으나 관심도 없는 족속들이야. 내 멋대로 짖다가 가는 거지 뭐. 빠꾸 빠꾹 빠빠꾹!

<b>해설 엿보기</b><br/><br/>올해 초부터 시간 날 때마다 생태공원을 끼고 조성된 집 근처 호숫가를 들락거렸다. 자연이 사람을 어루만지는 위력은 웅숭깊다.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메마른 양버들 가지에서 잎이 돋아나기 시작하며 반짝이는 걸 보았고 늙은 용버들이 물에 비친 제 그림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모습도 보았다. 어떤 꽃이 필 때 어떤 꽃은 졌다. 봄에 피는 꽃부터 가을에 피는 꽃까지. 지금 피어 있는 꽃과 도래하지 않은 꽃들의 이름을 수첩에 옮겨 적다 보면 뉘엿뉘엿 해는 지고, 이윽고 저녁이 오고, 어둠이 잠긴 호수 어디선가 물고기들이 뛰어올랐다가 다시 빠져드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그것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어떤 것은 그것이 사라지고 난 후에 길고 긴 여운만이 그 일이 실재했음을 알려준다. <br/><br/>성낙수 시집 해설 청탁을 받고 나서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겪었던 것들이 떠올랐다. 존재의 무늬는 우리 내면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시는 기쁨에서 시작하고, 충동에 쏠리고, 첫 행을 씀으로서 방향을 잡고, (…중략…) 마지막 시구에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지혜로운 동시에 슬픈 어떤 것”이다.<br/><br/>성낙수 시집 『파문의 힘』에서 두드러지는 몇 가지 가운데 하나는 ‘짧은 시’들로 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설 자체가 없어도 될 정도로 맑다. 들여다보인다(=쉽게 읽힌다). 필터가 필요 없는 물(=텍스트)이라니! 문학잡지의 지면에 발표하는 뭇 시인들의 시가 지나친 자의식으로 인해 거듭 읽어도 무슨 뜻인지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것이 상당함에 비추어 볼 때 성낙수의 시는 간결하고 쉽게 읽힌다는 강점이 있다. 시가 간결하며 접근성이 좋다는 것은 미덕이다. 분명 우리말로 썼는데 몇 번을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다면 시를 읽는 행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는가. 무엇보다, 시는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통로에서 서로 알아보고 반가워해야 마땅하다. 작품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쓰인 상투어가 난무하는 시들이나, 독자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시는 어김없이 외면받기 마련이다. <br/><br/>이른 새벽<br/>긴급 문자로 알려 온<br/><br/>부고 문자보다<br/>슬픈<br/><br/>한 줄<br/>이별 통지<br/>― 「그믐달」 전문<br/><br/>시는 설명을 생략함으로써 독자를 끌어들이는 언술 형식이다. 시가 요구하는 사유에서는 대상의 겉만 다루는 획일적 사고가 아닌, 대상이 지닌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어 그것이 함의하는 부분까지 넓고 깊게 들여다보는 다면적 사고가 중요하다. 누가 봐도 슬픈 것을 슬프다고 반복하는 순간부터 슬픔은 질식당한다.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할 줄 알면 시는 힘을 얻는다. 얼핏 크게 주목할 만한 부분이 없는 이 시가 왜 눈길을 끄는가. 그것은 ‘이별’이라는 비통과 애절함을, 그 정서를(“한 줄”) 그믐달이 지닌 이미지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br/><br/>시가 짧다고 해서 쓰기 쉬울 거라 생각한다면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다. 길고 설명적인 시보다 짧고 압축적인 시가 훨씬 쓰기 어렵다. 시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경험이나 대상에 대해 서술하듯 꼼꼼하게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시가 지닌 의미와 구조가 대상을 보다 선명하게 효과적으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br/><br/>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언어는 관습과 타성에 들러붙어 굳어진 언어이다. 시가 요구하는 언어는 다르다. 시를 쓴다는 행위는 이러한 관습과 타성에 고착되기를 거부하는 행위이며 언어가 가지는 폭넓은 의미를 탐구하는 행위이다. 때문에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비교했을 때 그 쓰임새와 격조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은 남다른 언어의 쓰임새에 대해 높은 인식과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이러한 능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능력은 수많은 좌절과 극복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개별성이다. 성낙수 시인 또한 이러한 압박감에서 자유롭기 힘들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고민하고, 실패하면서 그는 시 쓰기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때로 탄식과 자기연민, 혹은 성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br/>― 전결(시인)<br/><br/><b> 시인의 말</b><br/><br/>50여 년 시를 쓰며 나름 시인으로 살았지만<br/>아직 제대로 된 백자 하나 구워내지 못하고<br/>장 단지 아홉 개 빚는 데 그쳤다.<br/>앞으로 단지를 세 개 더 빚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br/><br/>아무리 오래 머물러도<br/>다정한 눈빛 주지 않는 것이 시인가 보다.<br/>끝까지 참아내어 오랫동안 벗 되어 살아가야겠다.<br/><br/>날이 밝아온다.<br/><br/>2023년 9월<br/>성낙수

성낙수 시인의 시가 지닌 특징은 그가 맞닥뜨리는 상황의 적절한 배치와 그것들이 환기하는 정서에 시적 상상력을 개입시키고 대상으로부터의 자극에 활달하게 반응하는 역동성에 있다. 세계를 바라보는 성낙수의 시선은 자신으로부터 대상으로, 혹은 대상으로부터 자신에게로 방사되거나 수렴된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을 통하여 시인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타자 혹은 대상과 자신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느끼는 성낙수의 시의 활달함이나 따뜻함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그는 독자에게 동조를 종용하지 않으며 그것을 위하여 애써 그 자신을 미화시키지도 않는다. 그의 목소리가 늦저녁 물가에 번지는 파문처럼 웅숭깊게 번지는 때가 바로 그때다. 그때 들려주는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소박해서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