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잠깐 지나면 풀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내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그 시간의 틈을 점점 더 넓게 벌려 놓았다. 한때는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는 틈인 줄 알았는데 끝내는 너무 멀어져서 끝이 보이지 않았고 건너가는 길을 찾을 수도 없었다.
--- p.87
“음악은 변하는 법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그만큼 강하고 본능적인 유대감을 갖게 되는 거야, 안 그래? 노래 한 곡으로 과거의 어떤 순간이나 장소, 아니면 사람에게까지 곧장 돌아갈 수 있잖아. 세상이나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변해도 노래는 그때 그 순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잖아. 그걸 생각하면 음악은 정말이지 놀라워.”
--- p.111
“무슨 뜻이냐면, 정말로 가까운 사람이라면 네가 화가 나든 자기가 화가 나든 괜찮은 거고 그것 때문에 변하지는 않는다는 거야. 어떤 관계든 화는 낼 수 있어. 늘 있는 일이지. 그걸 다뤄내야 하는 거고.”
--- p.175
“내 말은 적어도 다툴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안다는 뜻이야. 아니면 해결할 방법이라도 찾아볼 수 있잖아. 그런데 침묵은…… 알 수가 없어. 그냥……”
--- p.187
그게 문제였다. 빛과 어둠 사이의 차이가 전에는 분명했다. 하나는 좋고 하나는 나쁜 것.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다. 암흑은 여전히 비밀스러우면서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 어쩐지 두려웠지만, 나는 이제 빛 또한 두려웠다. 빛 아래선 모든 게 낱낱이 드러날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깜깜한 암흑 속에서 오직 한 가지, 가장 깊숙한 내 비밀들이 떠올랐다. 눈을 뜨면 이 비밀을 모르는 세상이, 피할 수 없이 환한 세상이 그 자리에 있었다.
--- p.316
그렇지만 오언을 쳐다보는 순간 모든 게 다시 떠올랐다. 공연에 불러 준 그날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그날까지 오언이 한 모든 행동들, 나한테 손을 내밀어 주고 나를 구해 준 우정까지 모든 것이. 몹시 외롭고, 두렵고, 화가 났던 날들, 하나같이 나를 외면하고 무시했던 순간들을 어쩐지 오언은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밤 에밀리를 봤을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 p.339
“가운데에 끼인. 맏이도 아니고 막내도 아니고 아주 당당하지도 않고 아주 다정하지도 않다. 나는 잿빛 그림자이며 보기에 따라서 반쯤 차거나 반쯤 빈 유리잔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우리 셋, 내 앞의 언니나 내 뒤의 동생 가운데 최초로 해낸 일도, 더 잘한 일도 별로 없다. 그렇지만 우리 셋 가운데서 뼈가 부러져 본 사람은 나밖에 없다.”
--- p.381
과거는 몇 가지는 알아챌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수백만 가지는 미처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시간은 쉽게 쪼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간이나 시작, 또는 끝의 경계를 그을 수 없는 게 시간이었다. 나는 과거를 묻어버린 척했지만, 그렇게 떼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p.391
그리고 나는 문득 내가 거기, 정적만 감도는 곳에서 도망치지 않고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그 소리를 듣게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면 파티가 열린 날 밤, 에밀리가 소피를 부르는 소리를 처음 들었던 그 지점까지 곧장 되돌아가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결국 그 길이 끝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 p.392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온 세상에 고요해지고 오로지 내 마음만 남게 될 때. 그럴 땐 그 소리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하는 소리를 영영 이해할 수 없으니까.
--- p.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