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찾아온 까닭이 뭣인지 말해 보싯시오.” 명창은 서글서글한 표정을 지어가며 짐짓 다정스럽게 물었다. 듣던 바와 같이 단아한 품새만큼이나 성품이 너그러운 것 같았다. “제 딸에게 소리를 가르쳐주시라고 왔구만요.” 뒤설레는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소리를 가르쳐달라고요?” “예.” “누구한테요?” 명창은 짐작이라도 가는 듯 수양을 향해 매운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 “제 딸한테요.” “딸을 이쁘게도 낳아 놓았소. 지금 몇 살이나 묵었소?” “열두 살이구만요.” “어허! 학교엘 보내 글공부를 시켜야제 소리를 가르쳐 어디다 쓸라고 그러는 것이요?” 하지만 명창은 얄브스름한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넌지시 맘을 떠보려 들었다. “꼭 소리를 가르치고 싶어서요.”---pp.24~25
잠시 기와집 으로 멍하니 눈길을 뿌리고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은 가다듬고서 발걸음을 떼었다. 득창은 마루 끝에 앉아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가 앞으로 다가와도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은 고무풍선처럼 텅 비어버리고 입마저 굳어버린 탓에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여보! 성음 아빠.” 아내는 경경(??)한 목소리로 애통히 부르며 다가왔다. 벅찬 감격을 감추지 못한 채 오열하는 목소리였다. 눈물이 질금질금 흘러내려 볼을 적시고 있었다. 득창은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내와 재회를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인데. 믿기지 않던 일이 실상으로 다가온 것이다. 지고지순한 아내의 숨결이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아내는 북받치는 감정을 달래지 못하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꺽꺽 울고 있었다. 둘이는 한참을 부둥켜안고서 벅차오르는 심회를 누르지 못했다.---pp.100~101
“워매! 내 돈!” 그는 무의식중에 중얼대었다. 아내에게 보내주려고 모아놓았던 돈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니 갑자기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이 밀려들었다. “맞어! 저금해놓은 돈은 어떻게 할 것이랑가요?” 시태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중에 찾으러 오라.” (…중략…) 가족들이 얼마나 원망을 하고 있을지 어깻죽지가 잘려 나가는 아픔이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말도 할 수 없었다. 들먹였다간 돌아올 뒤탈은 분명 인정사정없는 폭력이 가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략…) 부상병이라는 대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성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끼니때면 주먹밥 한 덩이를 던져주다시피 했다. 사람이 죽어간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비명에 신음의 소리를 해대어도 못 들은 척했다. 자기 나라를 위해 다친 사람들인데도 비정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했다. 인면수심(人面獸心) 말 그대로였다. 인정이라곤 털끝만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지 자문자답을 해보지만 모진 것이 목숨이라는 말밖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정황에서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생명이란 모질고 지독한 것이라는 말 외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살아남는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지원극통의 설움을 눈물로 쏟아가면서 망국의 한을 달랠 수밖에…….---pp.223, 256
미카엘 신부는 득창의 두 손을 꼭 쥐어주면서 기도해주듯 말했다. 그의 억양에는 알 수 없는 그 어떤 강한 신심이 뭉클 가슴에 와 닿게 만들었다. 그것은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사랑이었고 실천하도록 권유하고 나선 것이다. 득창은 새삼 신부의 가르침에 회오의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자신의 죄책감과 회한에 설움을 참지 못하고 훌쩍거렸다. “신부님! 말씀대로 고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요. 가서 신부님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살겄습니다.” 득창은 두 손으로 신부의 손을 움켜쥔 채 목이 메어 숨을 모아 쉬면서 애원하듯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나는 언제나 형제님을 위해 감사의 기도를 잊지 않을 것이요. 형제님은 우리나라의 은인이요. 일본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다 몸까지 다쳤는데도 죽어가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구해주었소. 이보다 큰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 어디 있겠소? 이제 조국이 해방되었으니 그곳에 가서 사랑을 실천하도록 해보세요.” “예. 신부님. 꼭 그렇게 하겄습니다요.”---pp.229~230
“그건 그렇고 명창대회 날짜가 잡혔단다.” “언제인가요?” 수양은 심히 두려운 듯 떠는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올 추석 뒷날이란다.” 명창은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살며시 미소 짓는 입가에는 믿음직스러움마저 배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휘굴리며 잔뜩 긴장의 눈치를 지어보였다. “수양아! 너 정도면 내놓을 만하니 걱정할 것 없다. 지금부터서는 창을 하기에 앞서 단가를 한 곡 불러야 한다. 내 보기엔 사철가가 어울릴 것 같다. 그리고 창은 심청가 중에서 심봉사 눈 뜨는 장면을 허도록 해라. 알았느냐?” “예. 스승님.” “원래 고수와 창자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허는 것이네. 창자의 표정만 봐도 그의 속마음을 읽어야 진정한 명고수가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면 창과 장단이 하나가 되어야 되는 것이니 그렇게 연습을 하도록 하소.” 명창은 대회에 나가기 전 고수가 해야 할 일을 말해주었다. 그만큼 고수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예. 스승님. 그리 준비하도록 하겄습니다요.”
불과 백여 년 전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을 당하고 6·25 전란을 겪는 동안 대한민국 여인네의 한恨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늘 눈앞에 없는 임을 그리워해야 했고 한편으로는 억척스럽게 삶을 꾸려 나가야만 했습니다. 개인적인 열망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어떤 작은 소망 하나도 이루지 못한 주인공 성요의 생은 참혹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그녀의 한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시대를 버티게 해준 우리의 위대한 어머니, 여인네의 피가 제 몸에도 흐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제 마음에는 그 여인, 주인공 성요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 거대한 울림에 가슴이 뜨겁습니다. 그녀의 애잔하면서도 당당했던 삶을 구성지게 풀어낸 소설 『소리』는 오늘날 풍요로움에 묻혀 ‘한’을 잊어가는 세대들에게 한국의 정서와 한국인의 정감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자료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