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독일의 모든 시스템이 우리 실정에 딱 맞는 제도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오랫동안 미국 체제를 그대로 답습해 운용하는 과정에서 굳어진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독일 모델에서 일정 부분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P7
각료 자리도 제1당이 독식하지 않고 연정 정당에게 일정 부분 돌아간다. 총리는 제1당 소속 의원이 차지하지만, 장관 자리는 정당 간에 배분되는 식이다. 기민당 집권 시절 18년간 외무 장관을 지낸 한스 디트리히 겐셔는 자민당 소속이었으며, 사민당 집권 시절 외무 장관을 지낸 요슈카 피셔는 녹색당 소속이었다. 2013년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는 14개의 장관직 중 내각의 제2인자인 부총리, 경제부 장관 등 총 6개 자리를 사민당에 양보하였다.
연정의 효과는 실로 지대하다. 국정 추진 동력이 발휘되고 정책 수행은 시너지 효과를 얻는다. 일단 수립된 정책들은 정당 간의 합의를 거쳤기 때문에 갈등 없이 계획대로 추진된다. 정부 정책이 집권당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가는 폐단과 설익은 정책의 양산을 막음으로써 정치 안정 또한 기할 수 있다. --- p.21
실제 독일의 역대 총리들은 모두 일찍 정치에 입문하여 단계적으로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다. 예를 들어, 아데나워 초대 총리는 쾰른시 부시장, 최연소 쾰른 시장을 지냈다. 빌리 브란트 4대 총리는 17세에 사민당에 입당하여 서베를린 시장, 외무 장관, 사민당 총재를 지냈다. 정치 입문이 다소 늦은 편인 헬무트 슈미트 5대 총리도 28세에 사민당에 입당하여 사민당 원내 총무, 경제·재무·국방 장관을 지냈다. 헬무트 콜 6대 총리는 18세에 기민당의 당원이 되었으며, 연방 의회 의원, 라인란트팔츠 주 주지사, 기민당 총재를 거쳤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7대 총리는 18세에 청년 사회주의자로 사민당 당원이 되었고, 니더작센 주 주지사를 거쳐 총리가 되었다. 구동독 출신 앙겔라 메르켈 현 총리는 17세에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청소년 조직인 자유 독일 청년단 회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통일 독일에서 연방의회 의원, 여성?청소년부 장관, 환경부 장관, 기민당 원내 총무 등을 거쳐 연방 총리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젊은 시절부터 의회와 행정부를 오가면서 정치력을 키우고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처음부터 ‘정치인’을 직업으로 삼은 것이다. --- p.33~34
브란트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평화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평화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유럽의 평화를 위해 미국, 소련, 동구권과의 관계 개선에 집중했다. 그가 추진한 동방 정책의 종착점은 평화였다. 브란트는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 등과 끊임없이 서신 교환 및 접촉을 통해 신뢰를 쌓으면서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 폴란드와 ‘독·폴 조약’을 맺으며 양국 간의 국경 문제를 매듭지었다. --- p.45~46
콜은 통일을 서두르면서 “3~5년 사이에 동독 경제가 꽃필 것”이라는 희망적 메시지를 설파했다. 그러나 통일의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공산 진영 제1공업국이라던 동독은 빈 껍데기에 불과했고, 들춰보니 빚만 2,500억 마르크(약 162조 원)나 되었다. 엄청난 통일 비용을 쏟아 부었음에도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지 않았다. 통일 후유증 역시 쉽사리 가시지 않았고,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높아만 갔다. 급기야 콜은 동독 시민들로부터 달걀 세례를 받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는 “통일 비용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면서도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고 하더라도 결코 달리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통일을 미뤘을 경우 더 큰 짐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P54
현재 중소기업과 관련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정의는 없으나, 독일에서 중소기업이란 통상 종업원 수 10~499명, 연간 매출액 100만~5,000만 유로 이하의 기업을 뜻한다. 독일 중소기업들은 대기업 못지않게 국가 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림 2〉를 보면 중소기업 수는 364만 개로 전체 기업 대비 99.6%, 매출액은 35.3%에 이른다. 또, 고용 인원은 79%를 차지함에 따라 실업 문제, 특히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나 근무 여건에 큰 차이가 없어 인재들이 대기업으로만 몰리는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동반 성장·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 p.89~90
독일 기업의 수명은 평균 90년 내외로, 5~6대를 넘어선 가족기업이 10만 개가 넘는다. 여기서 가족기업이란 2명 이내의 자연인(개인)이나 그 가족이 지분의 50% 이상을 보유하면서 경영에 참여하는 기업을 말한다. 특히 중소기업은 대부분 가족기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족기업들은 평균 3대를 이어 오면서 한 우물을 파 최고의 기술력과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가족기업으로 세탁기 회사 밀레, 필기구 회사 파버 카스텔, 제약회사 머크, 오디오 기기를 생산하는 젠하이저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들이 수두룩하다. 이 가족기업들은 전체 독일 기업체의 95%, 매출액의 41%, 종업원 수의 61%를 차지하며 독일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p.102
‘어젠다 2010’ 개혁은 국민들에게 고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결국, 슈뢰더 총리는 이 개혁 추진으로 지지자들의 지지를 잃고 선거에서도 패하여 정권까지 잃었다. 그러나 개혁의 효과는 후임 메르켈 총리에 이르러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5년, 486만 명에 이르는 실업자와 11.7%에 달했던 실업률이 2015년에는 각각 279만 명, 6.4%까지 떨어졌다. 2016년에는 6.1%로 떨어졌다. 통일 후 가장 낮은 실업률을 기록한 것이다. 2004년 고용률은 64.6%로 최저였지만, 2016년에는 고용인구 4,350만 명에 고용률 75%를 달성했다. 2009년,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학 교수는 독일의 고용 증대를 ‘고용 기적(Job Miracl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p.121~122
실업 상태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정책적 배려가 따른다. 교통비 50% 이상 할인, TV 시청료 면제, 전화비 할인 외에, 연간 2회의 오페라 관람, 4회의 박물관 방문, 12회의 수영장 사용, 그 외에 아이가 있을 경우 연 2회의 동물원 방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 존엄성 유지가 가능하도록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 p.127
예를 들어 월 3,000유로(약 390만 원)를 받는 근로자의 경우, 소득세·통일세로 약 19%가 나간다. 그리고 건강보험료, 요양보험료, 실업보험료, 연금보험료 등 사회 보험료로 약 21%를 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40%가 공제되고 내 손에는 230여만 원만 들어온다. 물론 월급이 많을수록 소득세율이 올라가, 최고 45%에 이른다. 따라서 소득이 좀 더 높으면 급여 절반이 싹둑 잘려 나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국가가 상당 부분을 보충하여 전체 재원을 마련한다. 실업수당 재원은 정부가 절반을 지원하고, 연금보험도 정부가 일정 부분을 부담한다.
이렇게 각종 세금과 부담금으로 월급 중에서 큰 덩어리가 빠져 나가기 때문에, 고액 연봉가나 자산가들이 아닌, 보통의 월급쟁이들은 여유로운 삶을 살기 어렵다. 그런데도 사회적인 불평이나 불만이 없다. 이러한 부담은 중간에 다 새지 않고 결국 나중에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기대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 p.134
독일의 초등학교는 인성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이다. 지식이나 경쟁심이 아닌 협동심, 독립심, 사회적 유대관계 등 인성을 가르친다. 주마다 혹은 학교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1학년 때에는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지 않는다. 친구들이랑 같이 놀거나 그림을 그리고 블록을 쌓고 체육 활동을 하면서 수업에 흥미를 느끼도록 유도한다. 2학년쯤 되어야 ABC 등 간단한 글을 배운다. 그러다가 3학년 때부터 글쓰기 작문 등을 배우기 시작하고, 4학년이 되면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 p.141
독일에서는 임기의 연임 제한이 없다. 총리도 단임제가 아니다. 4년마다 치르는 총선에서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받으면 얼마든지 재임할 수가 있다. 1949년 건국 후 지금까지 67년 동안 8명의 총리가 나왔으니 평균 8년 이상을 재임한 셈이다. 아데나워 초대 총리는 14년, 헬무트 콜 총리는 16년을 역임했다. 메르켈 현 총리도 2016년 말 현재 4년 임기를 3회째 연임하고 있다. 재임기간이 12년째다. 임기가 만료되는 2017년 9월 총선에서 4연임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장관 임기도 보통 정권과 수명을 같이 한다. 디트리히 겐셔 전 외무부 장관은 18년, 한스 아이헬 전 재무장관도 8년을 재직했다. 민간 기업에서 오너가 아닌 전문 경영인도 능력을 인정받으면 장수한다.
그런데 이렇게 장기간 재임했다고 해서 독재자라고 비난한다거나 “물러나라, 퇴진하라”는 소리는 없다. 불공평하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다. 모든 요직마다 ‘갈 만한 사람들이 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국민들 간에 불평·불만, 위화감이나 좌절감 등이 생길 여지가 없다. 이러한 중요한 자리는 ‘여러 사람이 골고루 나눠 먹는다고 평등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는 인식이 배어 있다. 자질과 역량이 있는 지도자로 하여금 국가를 위해 비전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오랜 기간 봉직 기회를 주는 것이 오히려 공평하다고 인식되는 사회가 독일이다. --- p. 168~169
여기에 독일의 부상이 향후 세계 질서 재편을 예고하고 있다. 앞으로 독일의 국력이 더욱 팽창하여 세계 패권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현재 학계·전문가 그룹 사이에서도 독일의 패권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전 세계 학자들, 언론들도 “패권 국가 독일”, “제4제국”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쓰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미주 대륙,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대륙과 함께, 독일 중심의 유럽 대륙 등 3대 세력권이 세계 정치·경제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각축을 벌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독일의 부상에 대해 긴장과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 p.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