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적당히 즐거웠다. 누군가는 적당한 즐거움이야말로 2배의 즐거움을 준다고 했다. 소소한 기쁨과 확실한 성취감을 가져다주었다. 무엇보다 달성해야 하는 수치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었다(나는 숫자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 전공이나 먹고사는 일과는 무관한 것을 하니 해방감이 들었다. 일만 아니면 무엇이든 괜찮았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잠시 현실을 망각하게 했다. 선과 색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렸다. 가끔씩 텅 빈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를 돌아보게 됐다. 그림은 살면서 잊고 있던, 혹은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나다움’의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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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삶을 제법 능숙하게 살고 있다. ‘워라밸’이란 단어가 유행하기 이전부터 나는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했다. 직장을 선택할 때도 야근 문화를 따졌다. 필요한 야근은 괜찮지만, 야근을 강요하는 분위기라면 사절이었다. 연봉보다는 정시 퇴근이 중요했다. 물론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직도 원룸살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을 보면.
한때는 하루, 아니 모든 일상이 일과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었다. 출근도 하기 전에 퇴근을 하고 싶었다. 정작 퇴근을 해서는 회사에 대한 불만과 스트레스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그렇게 몇 년간 회사에 다니다 보니 직장이 아닌, 생활 자체에 회의가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지도 못하고, 서울을 당장 떠날 수도 없는 상황…. 상황을 바꿀 수 없으면 마음을 바꿔야 한다. 그때부터 나를 위한 직장 생활을 해보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하루 2시즌제다.
요즘 나의 하루는 퇴근 전과 후, 2회로 나뉜다. 직장인으로서 8시간의 삶을 살고 난 후 ‘온전한 나’로서의 하루가 시작된다. 하루를 두 번 살려면, 퇴근 전까지 딴생각할 틈이 없다. 정시 퇴근을 하려면 집중력과 추진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했다. 업무에 파이팅 넘치는 사원으로 보이는 건 덤이었다.
직장 생활 10년차가 되고 나서 뒤늦게 내린 결론이 있다.
‘회사는 내 것이 아니며, 내가 없어도 망하지 않더라.’
--- p.61~62
그림을 배우기 전에는 이런 약속을 위해 일을 미루고 대기하거나 하던 일을 멈추고 나가기도 했었다. 사람을 좋아한 탓에 나의 시간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간을 정할 때 확실한 시간 단위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부터 시간이 괜찮아.” 그건 내 시간에 대한 존중이었다. 약속한 시간에는 철저히 ‘만나면 즐거운 사람’이 되고자 했다. 기꺼이 시간을 내준 상대에 대한 예의였다.
본 지 오래됐다거나 거절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약속을 잡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것은 놀라울 정도로 내게 많은 시간을 벌어주었고, 그 시간을 그림 그리는 시간으로 채울 수 있었다.
그림을 배우기 전에는 한두 시간이 남았다고 하면 뭔가를 하기에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를 만나러 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고 책이라도 읽자니 먼저 청소를 해야 했다. 그것이 귀찮아 카페에 가려니 옷을 입고 눈썹을 그려야 했다. 책을 읽기 전에 준비할 게 많았다.
그렇게 한두 시간은 무엇을 할지 고민하며 보내는 게으른 시간일 뿐이었다. 퇴근 후 저녁 시간이 그랬다. 하지만 그림을 배우면서 그 시간은 꽃 한 송이를 피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임을 알게 되었다.
--- p.75~76
구상했던 사진을 다시 보며 달콤한 하늘색을 만들었다. 그리고 큰 붓으로 큼직큼직하게 바탕을 칠해나갔다. 르누아르처럼 발랄하게 붓 자국도 내보고 고흐처럼 물감을 두껍게도 발라봤다. 주위 사람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게, 그날 작업을 위한 작은 계획도 세웠다. 이때부터 그림 일지를 쓰기 시작한 것 같다. 심 소장님의 주문 덕에 눈물 대신 미소로 자화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새로운 그림을 준비할 때면 심 소장님을 찾았다. 선생님한테 상의하기 전에 먼저 보여주기도 했다. 그림을 상의한다기보다는, 심 소장님의 응원과 예쁨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거 해보려고요, 근데 너무 흔하죠?”
“좋아요, 해요! 하고 싶은 것을 해요!”
“여기 창문도 넣을까요?”
“어어, 너무 좋아. 해요!”
“그림 안에 그림 넣으면 유치하겠죠?”
“아니, 너무 좋다니까. 해요, 하고 싶은 것을 해요!”
심 소장님은 내가 하는 것은 다 좋은가?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근데 창문은 반듯하게 그리면 좋겠네.”
이렇게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주었다. 가만히 보니, 심 소장님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용기가 예쁜 모양인 듯했다. 어쨌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용기를 장착하게 되자 모든 일이 신이 났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순간에도 말이다.
--- p.154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 무언가를 갖고 싶은 것, 무언가를 먹고 싶은 것… 내가 원하는 ‘무언가’가 모여 꿈이 된다. 그림을 그냥 그리고 싶어 해도 되고,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 해도 된다. 그림이 아닌 다른 것이어도 괜찮다.
취미나 놀이를 하는 어른들은 늙지 않는다. 대화하고 사고하는 방식이 확실히 다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가장 자신 있던 시절의 모습이 과거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생의 한가운데에 들어왔다.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았던 미래는, 별다를 것 없는 오늘이었다. 덕분에 삶의 끝자락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 나이 먹음이 무색하지 않게, 삶이 주는 크고 작은 파도 안에서 헤엄치는 법은 배워둔 듯하다. 니나처럼, 때로는 니나의 언니처럼 방법은 다르지만 그림 그리듯 삶을 가꿀 줄은 알게 되었다.
--- 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