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4-105
여성들만의 친밀한 관계가 새로운 문화처럼 떠오르자, 조선사회는 여기에 동성연애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동성연애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것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기자와 의사로 이름 높았던 여성들이 자신의 동성연애담을 지면을 통해 즐겁게 늘어놓고 있는 것만 보아도 동성연애라는 말이 그렇게 꺼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이는 당시 조선 사회가 여성은 본래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믿었던 데에 기인한다. 10대 중반의 여학생들은 성적으로 무지하고 수치심이 많기 때문에 성욕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동성에게 빠진다는 것이다. 반면 남성들의 '동성연애'는 바로 '변태'와 연결하여 매우 위험시했는데, '분별력 있는 남성들'이 직접 성욕 쾌감을 찾는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 빠질 일은 없다는 이유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동성연애는 성질이 연삽하고 유순하고 보다 정서적인 여성의 전유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조선사회가 보기에, 여성들의 동성연애는 이성애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현상에 불과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한 과정이기도 했다. 이는 이성애를 정상으로 보았지만 이성간의 자유연애는 위험하게 생각했던 시대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다.
--- p.104-105
한 사람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홍석후의 21살 된 딸 홍옥임이었고, 또 한 사람은 종로 덕흥서림 주인 김동진의 시집간 딸 김용주였다. 홍난파의 조카이기도 했던 홍옥임은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다니고 있었고, 김용주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도중에 퇴학을 하고 하기 싫은 혼인을 한 터였다. 두 사람은 홍혹임이 한때 동덕에 다녔을 때 '서로 떨어져서는 살 수 없던 동성의 애인' 사이였는데, 김용주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홍옥임이 동정해왔다고 한다.
--- p.92
'전쟁 미망인'들의 직업 상황을 보면 전체 '미망인'의 절반 가량은 농업에 종사했다. 보수적인 농촌 공동체 안에서 농업노동 전체를 책임져야 했던 이들 '전쟁 미망인'들은 그야말로 '일하기는 농노처럼, 몸가짐은 수녀처럼 하면서 시부모를 섬기고 시누이를 돌보고 아기를 길러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농사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많은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도시로 찾아갔고, 재산을 가진 여성들은 그 재산들을 팔아사 장사를 하기도 했다. 소수의 일부 여성들은 모자원 등을 통해서 양재·직조·제과 등의 직업기술을 익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산도 없이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하고, 직업기술도 갖지 못했던 '미망인'들이 쉽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거나 윤락여성이 되는 것이었다.
--- p. 130
단지 우리는 여성 경험을 의미화하는 이론적 전망과 함께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을 획일화시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의 기획은 기존의 역사가 어떤 경로를 통해 남성의 역사로 상징되어왔는지, 역사가들이 상징 권력과 지식 생산의 과정에서 어떻게 특정하게 선택된 사실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출발한다.
---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