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쉽게 그릴 수 있는 소묘에 재미 붙였다. 주위에 널려 있는 잡동사니 중에서 만만한 놈을 골라 그린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오랫동안 방치한 감각이, 종이 위에서 연필을 움켜쥐고 우왕좌왕하는 손이,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신바람 나게 그렸어도 영 신통치 않다. 그래도 잡동사니들과의 잡담이 즐거워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길이 그리워서 나는 계속 그린다.
--- p.6, 「작가의 말」 중에서
아무쪼록 별처럼 반짝이는 작품 하나 남기고 죽을 수 있기를… 단언컨대 이 욕구는 코로나 방콕으로부터 내 육신을 자유롭게 할 유일한 탈출구가 될 것이다.
찰랑찰랑 넘치는 돌확의 물속으로 새파란 하늘이 녹아든다. 중정에서 주방 창문으로 거실 쪽을 넘겨다보니 남편이 TV에 시선을 꽂고 소파에 앉아 있다. 딴 세상 같다. 무심히 돌아서서 양팔을 힘껏 뻗고 기지개를 켠다. 세상이 요동을 쳐도 내 집 정원의 꽃은 나비를 불러들이고, 필시 까치 부부도 곧 맑은 물에 몸을 축이러 내 집에 다시 오리라.
--- p.17, 「프롤로그」 중에서
평소에도 외출이 잦은 편은 아닌데 코로나 때문에 사회적 거리를 두고부터는 아이들도 발길을 끊었고 나도 집에 들어앉아 하릴없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바람도 쐴 겸 운동 삼아 설렁설렁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세월을 보낸다. 차 운전하며 휙 지날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구석진 곳에 오밀조밀 꾸며놓은 가게 안을 기웃거리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그중에서도 내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꽃집이다.
연희동 먹자골목에는 용케 꽃집이 세 군데나 있다. 동네에 정원이 있는 단독 주택이 많다 보니 그에 어울리는 개량종 야생초를 많이 갖다 놓는다. 나는 욕심껏 들풀 같은 야생초를 정원 여기저기에 잔뜩 심었다. 그래서 돌과 이끼만으로 고즈넉하게 꾸민 우리 집 정원이 내 손길에 의해 망가질 때쯤, 그 일도 더 이상 할 게 없어진 어느 날,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일찍 끝났다. 난 할 일을 찾아 서성대다가 냉장고 청소를 시작했다.
--- p.22, 「슬기로운 방콕생활」 중에서
가뭄과 함께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된 7월의 어느 날, 평소처럼 남편은 오전 10시쯤 작업실로 나가고, 나는 미뤄왔던 대청소를 시작했다. 이중창 안쪽의 얼룩을 닦으려고 창틀에 선뜻 올라선 나는, 유리벽에 등을 대고 걸레 든 왼팔을 길게 뻗다가 이중창 손잡이를 잡고 있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그만 문이 철컥 닫혀버렸다. 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중창은 보안상 안쪽에서만 열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창과 창틈에 샌드위치처럼 끼어버린 것이다.
핸드폰은 수중에 없고 남편도 방금 나갔으니 적어도 아홉 시간은 나를 구해줄 사람이 없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아파트 정원을 내려다보니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 p.43, 「내 안의 낯선 나」 중에서
여러 날을 낑낑대다 할 수 없이 담당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 얘기 말고는 쓸 만한 게 없다고….
젊은 기자가 친구 얘기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웃으며 조언을 해주었다. 그것도 결국 남편의 친구 얘기긴 마찬가지였다. 딸이 보낸 메일을 다시 읽어보았다. 같은 얘기라도 엄마의 시선으로 본 것을 쓰라는 얘기다. 당장 뇌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어려운 주문이다.
결국 기자가 원하는 글은 아쉽게도 쓰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단념하긴 이르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내 안의 내가 소리친다.
단언하건대, 난 죽기 전에 신나게 글을 써보고 싶다. 더 욕심내자면 그림도 다시 그리고 싶다. 그리하고도 또 남은 욕심이 있다. 나의 작은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도 열고 싶다. 아니면 글과 그림을 모아 자그마한 화집을 꾸며보고 싶다.
버킷 리스트 1이다.
--- p50., 「버킷 리스트 1」 중에서
멸치 똥 한 포를 앉은자리에서 다 따는 뚝심으로 크게 될 것이라고 했던 할머니의 평가와 인정이 나의 인내심을 키웠다면, ‘화나면 무서운 애야’는 언제라도 필요한 에너지를 끌어내고 어려운 문제는 정면에서 해결하는 내 스타일에 어떤 것보다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내 동생들도 다 할머니 손에서 자랐건만, 할머니를 기억하는 건 나뿐인 것 같다. 배은망덕하게도 ‘나머지 것’들은 잘 기억을 못한다. 이래저래 정 씨는 오롯이 나만의 할머니로 남았다.
--- p77., 「나의 할머니_마이더스의 손」 중에서
전쟁이 터진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은 텅 빈 서울에서 끝까지 버티다 결국 1.4후퇴 때 경남 진해로 피난을 갔다. 언니가 해군 약혼자를 따라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부모님은 언니의 결혼식을 올려주고 낯선 진해에 주저앉았다.
다음 해 3월, 서울이 다시 수복됐다고는 했지만,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곳 도천국민학교에서 6학년을 마쳤다. 그 전쟁 통에서도 입시제도가 바뀌어 우린 국가고사를 보고, 성적에 따라 중학교를 선택 지원하는 첫 세대가 되었다. 나는 부산으로 피난 와 있던 이화여중에 입학원서를 냈는데 너끈히 합격했다. 이리저리 쫓기며 동냥질하듯 공부했지만, 피난 바람에 6학년 공부를 2년이나 한 셈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 p.109, 「나의 사춘기 1」 중에서
올해가 2015년이니까 제주도 집에 들락거린 지도 어느새 9년을 바라본다. 올 가을도 안 가겠다고 버티다가 할 수 없이 따라 나선다. 남자 혼자 아무 때나 훌쩍 다녀오면 될 일을 왜 싫다는 사람 끌고 가냐고 하겠지만 거기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식사가 큰 문제다. 삼시 세끼 다 외식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식당엘 가자면 일일이 택시를 부르는 것이 쉽지가 않다. 보통 20킬로미터는 내달려야 한다. 폐차 위기에 놓인 사위의 애마 인피니티를 거금 들여 제주도에 가져다놓았지만, 낯선 거리를 달릴 배짱이 남편에게는 없다. 내비게이션을 부착했지만 안타깝게도 사용 능력 또한 없다. 그러니 나를 죽어라 끌고 내려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58년 경력의 주방장 자격과 34년 무사고 운전 경력의 소유자, 게다가 월급 안 줘도 돼. 계단 오르내릴 때 부축도 해줘. 이런 복덩어리를 어디서 구하겠는가?
--- p.158, 「수련 살리기」 중에서
그로부터 56년이 흘렀다. 세상은 풍족하고 편리해졌다. 그러나 황혼으로 접어든 우리에겐 멀기만 하다.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잘 적응 못하는 것이 그저 면구스럽다. 딸이 온라인 쇼핑을 권하지만 난 그래도 시장바구니 들고 식료품 사이를 기웃거린다. 내 안 깊은 곳에는 여전히 헐벗은 아이가 숨어 있다. 풍족하면 할수록 감사하는 마음과 동시에, 죄책감을 일깨워주는 내 안에 또 다른 나. 그 아이에게 그리움을 담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 p.205, 「주소 없는 집」 중에서
결혼하고 4년 동안, 6개월마다 정신없이 이사를 다니다가, 처음으로 내 집이라고 장만한 곳이, 신촌에서도 제일 환경이 고약한 철길 옆이었다. 화물 기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연탄가루를 휘날리며 지나다녔다. 우린 바로 그 철둑 밑에 방 둘 부엌 하나 딸린 무허가 집을 산 것이다. 연탄 공장 바로 코앞, 먼저 살던 집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조금 비켜난 것은,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 p.233, 「철길 옆 판잣집」 중에서
나 역시 학창 시절에 연극 좀 해본 사람이라, 배우의 자질이 잘생긴 외모와는 얼추 무관하다는 것쯤 알고 있다. 그래서 남들이 시동생 말을 콧등으로 들을 때도 나는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끼’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심한 열등감까지 겹쳐 상대하기 쉽지 않다 보니, 갈수록 천덕꾸러기가 되는 꼴을 내 힘으로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시동생 처지가 동갑내기 내 남동생과 비교될 뿐 아니라, 천진하고 귀여웠던 소년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더 아쉽고 안쓰러웠다.
--- p.241~242, 「주소 없는 집」 중에서
겨우내 실내에 있다가 조급하게 밖으로 내몰린 양란이 ‘노루 귀’ 옆에서 찬바람에 떨며 웅크리고 있다. 잎에 윤기가 사라진 것을 보니 머잖아 몸살을 앓을 것 같다. 측은지심이 들지만 봄에 새싹을 틔우려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웬만한 추위는 견뎌내고 바짝 움츠리고 있어야 힘차게 밀어 올릴 힘이 생기는 법이다. 오래 살다 보니 세상 이치가 그러하다.
--- p.297,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