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전도연이 있고 영화속엔 전도연이 없다 중에서 이 영화가 내게 만족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도시락을 난로위에 쌓아 놓는 모습은 어설프기 이를데 없고(도시락은 4교시 끝날 무렵이나 쉬는 시간에 난로에 올려놓는다), 점심을 가지고 오지 않은 아이에게 도시락을 주는일은 <검사와 여선생> 때부터 선생과 가난한 제자 사이의 일이고~ 선생님이 일기장을 집으로 가지고 온일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 p.46-47
영호의 뒤로 터널을 빠져 나온 기차가 타나난다. 피할 길이 없다.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빠르게 다가온다. 영호는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정면으로 돌아선다. 기차와 정면으로 맞서는 이 장면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감독의 뱃심 좋은, 확신을 가진 의도였다. 감독은 시대의 아픔과 사회적 혼란으로 망가진 영호라는 인간을 들고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면서 지난 20년 세월을 추호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이 장면에서, 이 영화가 그냥 영화가 아니라 작품임을 보여 준다. 이창동 감독의 작가다운 자기 확신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 p.
아, 인생아! 내 인생도 영화가 될 수 있을까? 인생의 희망과 절망, 끝없는 욕망과 순간의 좌절, 슬픔과 기쁨, 눈물과 환희, 기다림과 그리움과 간절함과 사랑의 미련과 아련함 등 우리가 가 닿을 수 없는 것을 영화는 우리 코앞에다 펼쳐놓는다. 영화는인생의 이 모든 것들의 처음과 끝을, 완성을 보여준다는 데 그 매력이 있다. 누구나 한번쯤 꿈꾸어 온 사랑을 보여주고, 우리의 세상에서 결코 완성할 수 없는 인생을 영화는 보여주는것이다. 이 끝이 없을 것 같은 영화의 매혹은 늘 나를 사로잡아왔다.
--- p. 11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인생, 다시 시작하고 싶은 사랑. 그러나<박하사탕>은 옛날로의 회귀를 꿈꾸는 영화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이다. 영호의 볼에 흐르는 한없는 저 순수한 눈물은 내 볼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인 것이다.
--- p.25
나는 영화 전문가도, 영화를 공부한 적도 없다. 그러나 영화 전문가들의 영화에 대한 평이나 글을 읽어 보면 너무 어렵기만 하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우리의 영화 연구 수준은 아직 바닥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영화 이론서들도 지나치게 외국 이론을 도입했거나 우리의 것들은 또 너무 얕다. 답답하다. 아무튼 나는 그때에도 전주에서 영화를 꾸준히 보았고, 전주에 옮겨와 살게 된 지금도 꾸준히 영화를 본다.
--- p.83
42그 여선생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도 싫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감정은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 벚꽃이 구름같이 만발하면 나는 어쩔줄을 몰랐다. 그런 날 숙직이라도 하면 나는 달빛을 받으며 운동장을 돌아다녔다. 달이 뜬 밤 벚꽃으로 인하여 달빛은 창백할 정도로 환했다. 그렇게 숙직을 한 밤이면 그 여선생은 꼭 내게 저녁밥을 해서 학교로 보냈다. 동네 아이들에게 들려 보낸 상보로 덮은 밥 쟁반 속에는 꼭 편지가 들어 있었다. 반찬은 없지만 맛있게 먹으라는 짧은 편지였다. 나는 밥보다도 그 편지가 더 맛이 있었고 달콤하기까지 했다. 밥을 먹고 나면 나도 짧은 쪽지를 써 보냈다. 그런 밤 나는 잠을 이룰수 없어 운동장 벚나무 밑을 헤매었던 것이다.
--- p.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