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왜 이러지……?’
뭔가 불길했다. 그답지 않게 왜 자꾸 그런 감상에 빠져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백상이가 ‘자연사’한 뒤로는 좀처럼 그 녀석을 떠올리는 일은 없었는데…….
“너무 맛있겠다.”
수영은 도시락의 뚜껑까지 열어젖히고 젓가락 세팅까지 끝냈지만 그래도 보고들은 게 있었던지 냉큼 입에 먼저 넣지 않고 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제발 입에 넣어 주십사 하는 말 없는 그 청에, 익준은 못 이기는 척 젓가락을 쥐고 초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맛이 어때?”
채 씹기도 전에 묻는 그녀.
‘또 저런다. 귀엽던 발바리. 왜 자꾸 널 통해서 그 백상이를 보게 되는 건지……!’
“너도 먹어 봐.”
우물우물 입을 가린 채 말했다.
“오케이!”
그제야 제일 먹고 싶었던 알 초밥 하나를 입에 넣고 행복한 듯 오물거리는 그녀!
‘귀엽다. 백상이 보다도 더 귀엽다.’
저도 모르게 익준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날치 알을 훔쳐 주었다.
“어!”
그러나 전혀 뜻밖에 수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갑자기 벌떡 일어서 버렸다.
“왜? 왜 그래?”
‘털어주느라 그런 거긴 하지만 허락 없이 다 큰 아가씨 입가를 만져 버리다니……! 내가 이렇게 생각이 없는 인물이었던가!’
지나치게 친밀했던 자신의 행동도 분명 큰 죄(?)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놀랄 것도 없어 보였다. 어찌나 놀랐던지 벌써 소파 뒤로 숨어 버린 그녀를 익준은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왜 저러지……? 누가 자기 몸에 손대는 걸 싫어하나?’
아니다. 좀 전에 임 비서랑 목욕까지 하고 온 그녀를 생각하면 딱히 그것도 아닌 듯했다.
‘내가 남자라서 그런가? 부끄러웠나?’
단지 부끄러워서라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뭔가가 분명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녀를 만나고부터 자기답지 않은 행동 투성이었던 익준은 애써 모르는 척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차라리 그 편이 그녀를 더 편하게 해줄 것 같기도 했다.
“날치 알이 입가에 묻어서 닦아 주려던 것뿐이야. 미안하다. 손 안 댈 테니까, 얼른 먹어.”
무심하게 말한다고 한 건데, 내뱉고 보니 또 그답지 않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라……! 내가 이제껏, 누구한테 건 미안하다란 말을 내뱉어 본 적이 있었던가?’
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적이 없던 것 같았다.
‘뭐야, 뭐! 짧은 몇 시간이었지만 널 만나고부터는 왜 이렇게 내가 나를 벗어나게 되는 건지……! 넌 내 손길이 두렵다지만, 난 네 존재가 벌써 두렵다.’
“배 안 고파? 같이 밥 먹자고 씻기까지 한 건데, 네가 안 먹으면 소용없잖아.”
웅크린 몸이 얼마나 작았던지, 소파 뒤에서 그러고 있으니 아기처럼 작게만 보였다.
‘왜 저리 작은 거야! 도대체 뭘 먹고 자랐기에……!’
“휴. 안 되겠다. 이거 싸 줄 테니, 너 혼자 갖고 가서 먹어.”
그녀를 보면 미처 있는 줄도 몰랐던 그의 마음속 감성적인 부분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기에 더 이상 이런 식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돌발행동을 핑계 삼아 내보낼 궁리를 했다.
‘길에서 자건 어디에서 자건 내가 알 게 뭐야!’
익준이 말없이 방금 열었던 도시락을 다시 추스르고 있는데, 그녀가 빠끔 소파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진짜…… 나랑 같이 안 먹을 거야?”
“…….”
그는 말없이 그 애만 쳐다보았다.
‘왜 저리 처량해 보이는지……! 같이 먹는 건 자기가 거절한 거나 마찬가지면서, 왜 네가 그런 눈을 하고 있는 거지?’
“미안해. 그냥 버릇이야, 버릇. 회장님, 우리 같이 먹자, 응?”
어느새 다시 싼 도시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녀는 슬금슬금 소파 뒤에서 나오면서 익준의 눈치를 보았다.
‘최수영! 너 대체 뭐야!’
“가져가서 먹어.”
그는 좀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싶었다.
‘그래, 지금이 그때야. 더 이상 얽히면 나도 내가 어떻게 무너질지 몰라! 하! 내가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그래봤자 내가 만든 성일뿐인데…….’
“…….”
더 이상 떼도 쓰지 않고 하도 조용하기에 이상해서 쳐다보았더니 그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뭐야, 뭐! 너한텐 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거냐!’
수영에게는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리워하는 모순된 감정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 아닐까……? 인지하진 못했지만 나조차도 그럴 것이다. 사람들을 그리워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들이 다가오는 것도 두려워하는 모순된 감정이 우리의 솔직한 자아일 테니까. 안 그런 사람은 지금 아주 행복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외로운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모른 채 처박아두기만 하는 아주 가혹한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일 테지! 아, 모르겠다. 도대체 저 눈빛을 피할 수가 없다. 오늘 하루 나를 벗어나 보면 어떨까?’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는 작은 수영을 보니, 어이없게도 익준은 자신을 감싸고 있던 그 어떠한 견고한 성도 다 허물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딱 오늘만! 오늘 하루만 그녀를 위해 봉사해 보리라! 그러고 나서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오면 되겠지……?’
그런 생각이 든 건 어쩌면 그 자신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싼 거니까, 나가서 먹을까?”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정말……?”
단순한 여자! 글썽글썽 눈물을 매달았던 촉촉한 눈이 나가서 먹자는 말 한마디에 금세 반달 눈이 돼 버렸다.
“그래, 인마! 얼른 나가자.”
“좋아. 그럼, 날 따라와! 내가 좋은 곳으로 안내할게.”
눈에는 여전히 눈물을 매단 채였지만 다시 씩씩한 모드로 돌아온 수영. 익준은 그 눈가의 눈물을 훔쳐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녀가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고 나면 오늘 하루만 허락한 자기와의 약속을 스스로 깨버리게 될까 봐 두려웠기에.
* * *
그는 말없이 그녀를 뒤따라 걸었다.
‘어차피 오늘 하루를 허락했으니 난 이래도 돼!’
올 때와는 또 다른 모양새로, 이젠 스스로 그런 핑계까지 대가면서 열심히 수영을 따라갔건만 모른 척 가면 좋을 것을 굳이 이렇게 물어보는 칼날 같은 그녀.
“왜 따라와?”
고개를 살짝 돌렸지만, 그의 얼굴을 보지는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서.”
“회장님은 비현실적이야. 그래서 날 꿈꾸게 해.”
“뭔 소리냐? 꿈꾸는 게 뭐가 나빠?”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그도 몰랐다. 그 순간은 꼭 그렇게 물어야만, 될 거 같았으니까.
“나한테 꿈은 독이잖아. 그걸 이해 못 해?”
“…….”
알 듯하지만 확실하지도 않았다. 더 이상의 질문도 없이 익준은 작은 그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러자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드디어 쿨 하게 결정을 내렸다.
“좋아. 따라와. 내 쉼터를 보여 줄게.”
“쉼터?”
“응. 보통은 어두워져야만 찾아가는 곳인데, 오늘은 안 하던 목욕을 한데다 배도 불러서 그런지 자꾸 잠이 와.”
참으로 노숙자다운 대답이라 실없는 웃음이 머금어졌다.
“왜 웃어?”
“그냥, 너다워서…….”
“평생 기억에 남을 친절함을 보여준 회장님을 위해, 나 역시 특별함을 베푸는 거야. 그래야 동등해질 거 같아서……. 난 가진 게 없으니 그것밖에 해 줄 게 없어. 그러니까 금방 가야 돼. 알았지?”
“그래.”
자신과 동등해지고 싶다는 그녀. 허무맹랑한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서로의 일상에서 파격을 감행했으니, 익준은 자신들이 정말 동등한 입장이라도 된 것처럼 여겨졌다. 뭔가 입장이 살짝 뒤바뀐 것도 같았지만, 어차피 그런 거야 그녀를 만나고부터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더 이상 걱정할 것도 못됐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