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결국, 개헌에 관한 일본인의 견해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군요.
일본 언론에서는 종종 개헌 여론 조사를 실시했는데, 한 조사 결과를 보면 이렇습니다. 2006년 2월 10-11일 <마이니치每日 신문>이 유권자 1,115명을 상대로 실시한 것으로, 응답자의 65%가 찬성, 반대는 27%에 그쳤죠.
'평화 헌법平和憲法이 일본의 평화 유지와 국민의 생활 향상에 기여했는가'라는 질문에 80%가 '기여했다'고 답했지만, 개헌에 찬성하는 이유로는 53%가 '시대에 맞지 않아서'라고 답했어요. 물론 반대론자는 전쟁 및 전투력 포기를 선언한 '9조 개정으로 이어질 우려'를 가장 많이(54%) 꼽았지만, 아무튼 반대론은 소수에 그쳤죠.
개헌에 관한 일본인의 찬성률은 완만하게 상승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평화 헌법이 '전후戰後 민주주의'에 기여했다는 것이 일본인들 다수의 시각이지만, 그럼에도 다수는 헌법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배치된다고는 볼 수 없는 결과라고나 할까요. 그런가 하면 비슷한 시기 실시됐던 <요미우리讀賣 신문>의 여론 조사는 개헌 자체에는 찬성이 다수지만, 9조 개정에는 반대가 다수라는 결과가 나왔죠.
아베安倍晋三 총리는 2006년 10월 CNN 등과의 회견에서 임기 내 개헌 계획을 천명하고 9조 개정 의지를 명확히 밝혔는데, 과연 개헌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여론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예측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군요.
선 생
재미있는 결과이구만. 나 같은 늙은이들은 아직은 호헌론자가 많다고 믿고 있는 편이지만, 일본 헌법의 핵심은 역시 9조에 있으니.
1항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이 발동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2항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ㆍ해ㆍ공군과 그 밖에 전투력은, 이를 보유하지 않고, 국가의 교전권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지.
'과연 일본인들이 일본의 헌법을 잘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어떻겠나. 왜냐하면 헌법 개정이 궤도에 올라 그것이 진지하게 논의된다면 일본인들의 헌법 지식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몇 단계 올라갈 것이고,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결과로 개헌에 대한 신중론이 확산될 수도 있겠지. 물론 이런 것은 추측일 뿐이지만, 호헌론자에게는 이러한 추측 자체가 별로 달갑지 않을 수도 있을 테고……. 우선 일본 헌법을 들여다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은데, 어떤 가 한번 따라와 보겠나?
"많은 전쟁은 그것이 침략적인 것이라도 '자위'의 명목으로 저질러진다. 때문에 자위권의 발동으로서의 전쟁도 포기해야 한다. 국제 평화 단체의 수립에 의해 모든 침략 전쟁을 방지해야 한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이 발언은 평화 헌법平和憲法의 겨냥점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셈인데 '경輕무장, 경제 우선'의, 이른바 '요시다 라인', 즉 방위를 미국에 맡기고 경제에 매진하자는 이 노선은 '전후 총결산'을 내건 1980년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 전까지 일본 본류 보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네. 물론 나카소네는 '자주 헌법 제정'을 내걸며 '요시다 라인'과의 결별을 선언했네.
'전후 민주주의'의 전면적인 부정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흐름을 지금 '아베安倍晋三 정권'은 미군 점령 아래서의 각종 제도를 교체하는 작업으로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지.
이야기가 다소 옆으로 새고 말았네. 일본 평화 헌법은 '자위 전쟁의 포기와 군대의 불보유'라는 '맥아더 노트'의 3원칙에 두고 있네만,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위 발언은 그러한 원칙을 정직하게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물론 그는 1950년 전쟁 포기가 자위권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로 입장을 바꾸었지만…….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1946년 5월 출범하고 다음달 25일 헌법 국회가 소집됐으며 제국헌법 개정안, 즉 '일본국 헌법안'이 중의원에 상정됐지.
이 법안은 1946년 11월 '일본국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공포되고, 1947년 5월3일 시행에 들어갔네. '평화 헌법'이라는 별칭을 가진 일본국 헌법은 '국민 주권과 평화주의, 국민의 기본적 인권 존중'이라는 대원칙 아래서 천황은 일본국과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국정을 수행할 수 없도록 했지. 역시 핵심인 9조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전쟁의 포기와 전력 불보유를 규정했네.
어떤가, 헌법이 제정되는 과정을 조금 따져 보면 우리가 앞서 논의했던 '헌법 강요'의 주제를 좀더 천착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번거롭더라도 들어가 보세.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협의가 합의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는 일본에는 대일 정책의 최고 의결 기관으로서 11개국이 구성하는 '극동위원회'[FEC]를 설치하는 일본 점령에 관한 새로운 합의로 각별한 의미를 지니지. 이 회의는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 사령부'[GHQ]를 휘하에 둔 일본 점령 정책 최고 의결 기관으로서 FEC를 설치하려는 소련의 책략의 산물이었네.
13개국으로 구성된 FEC의 결정은 다수결을 원칙으로 했지만 미국과 영국, 소련, 중국 등 4개국은 거부권을 가졌지. 하지만 긴급을 요하는 사안은 미국 정부가 FEC의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맥아더에 직접 지시하는 것이 가능토록 함으로써 미국은 일본 헌법 제정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됐다네. 극동위원회는 GHQ가 일본 정부에 헌법 개정을 지시한 직후인 1946년 2월 첫 회의를 열었지.
맥아더는 당초 개헌에는 관여하지 않으려는 생각이었지만 일본 <마이니치每日 신문>이 일본 정부가 자체적으로 작업한 '개헌 초안'을 특종 보도한 뒤 개입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이 정설이지. '개헌 초안' 천황의 이름으로 신민臣民들에게 하사된 흠정欽定 헌법인 메이지明治 헌법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을 정도로 구태의연했기 때문이었지.
맥아더는 GHQ 민정국에 개헌 초안의 작성을 즉각 지시했으며, 핵심인 9조는 사실상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지. GHQ는 헌법 초안을 불과 일주일 만에 작성, 일본 정부에 제시했다는 것이 정설이네. 일본은 '천황은 상징이며 심벌'이라고 명시돼 있던 이 안을 보고 경악했다는 것이지.
아무튼, 맥아더가 주도하는 과정에서 FEC는 필연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네. 특히 극동위원회는 새로운 헌법이 강요된 것이라는 감각을 일본인이 갖게 된다면 추후 파기해야 한다는 반동적인 움직임을 낳게 될 것으로 우려해 즉각, 또는 시간을 두고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지. 물론 맥아더는 새 헌법의 조속한 제정을 우선시해 이에 반대했지.
1946년 11월 3일 일본 헌법 공포 직전인 10월 17일 FEC는 헌법에 일본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헌법의 재검토를 결정했네. 또 일본 국민의 의견을 확인하는 방안으로 국민투표, 또는 이를 대신하는 적절한 절차를 취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을 결의했지.
FEC가 지시한 새로운 헌법의 재검토 기간은 1948년 5월부터 1949년 4월의 1년간이었는데, 결국 이러한 FEC의 결정이 담긴 문건이 맥아더의 손을 떠나 요시다 당시 총리에게 건네지기 전 새로운 헌법은 공포되고 말았다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들 하지만 당시 FEC가 추진한 대로 일본 헌법을 일본인들이 평가하는 절차를 거쳤다면 적어도 지금의 '헌법 강요론'은 쉽게 제기될 수 없었을 것이네. 하지만 점령 정책의 주도권을 소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미국은 좌익 진영을 중심으로 천황제 비판 캠페인 등이 나온 것을 빌미로 GHQ의 안을 밀어붙인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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