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반, 인류학적 연구는 지구적 규모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각이 인류학계에서 다시 인식되면서 새로운 취지의 문화(사회)진화론이 대두하였다. 신진화론이라고도 이야기되는 화이트의 에너지소비이론과 스튜어드의 환경ㆍ기술 복합이론이다. 서비스, 살린즈, 해리스 등이 이 이론을 더욱 세련되게 다듬었는데, 그들의 이론에는 인구증가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인구증가가 기술적 진전을 촉진하였는가 아니면 기술적 진전이 인구증가를 가능하게 하였는가라는 닭과 달걀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 이론들은 인구증가가 기술적 진전, 그리고 보다 포괄적인 사회통합에 의해 인류사회가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해명하였다. --- pp.35~36
이런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문화상대주의는 결코 문화변화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한 허스코비츠의 주장을 상기하고 싶다. 그리고 여기서도 문화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개인의 자유나 보편적 인권이라는 사고가 들어오기 이전과 이후는 문화 과정이 크게 다르다. 전통적 사회제도를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나타난 것은 새로운 외부사상을 차용하여 부모들과는 다른 문화화 과정을 체험한 결과, 전통에 관한 판단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래의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문화상대주의의 정치화’는 명백하게 문화상대주의를 오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래 문화상대주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고 판단을 바꾸며 자기 문화를 바꾸어 나갈 가능성을 강조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 p.95
맨 앞에서도 말했지만, 구조주의는 ‘언어론적 변환’과 함께 ‘근대적 주체의 해체’와 ‘진보주의적 역사관 비판’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특징은 문화인류학의 구조주의에서 한층 더 뚜렷하다. ‘근대적 주체’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한 오리엔탈리즘의 이원론에 의해 만들어진, 주변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체를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곳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초월적 주체와 동일하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서구근대 사고에 대한 구조주의의 비판은 구조주의 붐이 사라져 버린 지금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 p.112
다양성의 용인이나 이문화 공생을 권장하는 주장의 다수는 자유주의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비판적 다문화주의는 바로 이 자유주의적 전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예컨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는 다양한 차이의 자율성과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기성 공간에 포섭하려고 한다. 그러나 비판적 다문화주의는 그 기존 공간 자체의 구성, 즉 차이의 배열을 통하여 지배문화의 규범성이나 이른바 주류majority로 간주되는 사회구성원의 정통성이 어떻게 생겼고 유지되어 왔는가를 반드시 추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비판적 다문화주의는 문화나 정체성을 계급, 인종, 종교, 민족, 성차, 섹슈얼리티라는 다양한 차이를 주체화하는 권력이 교차하는 장으로 본다. 여기에 대해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제창된 다문화주의는 문화를 명확한 경계를 지닌, 이미 그곳에 존재하는 자율적 통일체로 취급한다. --- p.355
응용적 실천은 그 자체가 인류학의 하위 영역은 아니다. 지금 그것은 인류학적 실천 속에 녹아든 것, 바꾸어 말하자면 인류학적 실천 중의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스기시마 다카시는 인류학자들의 인류학 비판이라는 1980년대 이후의 커다란 전환에 관해, “(그것은) 인류학적 실천을 변화하는 세계에 맞추며 식민지적 틀을 대상화하여 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말한다. 이제부터 인류학은 응용적 실천을 용해의 결과로 생겨난 또는 생겨나고 있는 부산물의 하나로서 재인식하고, 그 ‘복권復權’도 포함하여 인류학적 실천의 전체상을 계속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 p.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