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가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10년 저쪽 세월인데 낙원동에 위치한 어느 허름한 선술집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모두들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갑자기 뇌성벽력과도 같은 고함 소리가 주변의 소란을 일시에 제압하고 있었다. 선생은 평소답지 않게 얼굴에 힘줄을 모은 채 입으로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나중에야 그 원인을 알고 나는 과연 그 답다,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연인즉, 상대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저명한 사회학자였는데 그가 지나치게 과격한 논리로 세상과 사람을 재단해대자 선생이 듣다 못 참고 대거리를 해댄 것이었다. (……) 경험 현실의 세부에 충실한 그의 시는 머리로 보다는 가슴으로 먼저 읽힌다. 그는 언제나 몸으로 뛰는 현장의 문학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시에서의 리얼리즘을 인식의 문제로 보아야지 표현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떠한 시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당하고 지당한 말이다. 근래의 그의 시적 영토는 광활해졌다. 이는 해외 여행이 잦은 탓도 있지만 세상을 보다 넓게 품어야 한다는 인생관의 반영이기도 하다.
---<민족시인 신경림>(이재무) 중에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罷場(파장)>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는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한 사랑 노래-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사나운 뿔을 갖고도 한번도 쓴 일이 없다
외양간에서 논밭까지 고삐에 매여서 그는
뚜벅뚜벅 평생을 그곳만을 오고 간다
때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면서도
저쪽에 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쟁기를 끌면서도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이려 하고 가고 워워 하면 서면 된다
콩깍지 여물에 배가 부르면
큰 눈을 꿈벅이며 식식 새김질을 할 뿐이다
도살장 앞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두어 방울 눈물을 떨구기도 하지만 이내
살과 가죽이 분리되어 한쪽은 식탁에 오르고
다른 쪽은 구두가 될 것을 그는 모른다
사나운 뿔은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
---<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