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와의 사이에 말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는 게 좋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소중히 여긴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들이 내 안에 쌓여 문장이 된다. 나는 그 고인 물을 다 퍼내고 싶지 않았다. 그 웅덩이에 맺힌 그림자,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 잠자리가 날아와 알을 낳을 수 있는 수면, 검은빛을 띠고 잘 썩어가는 냄새. 나에게는 그런 풍경이 알맞다고 여겼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말 뒤에 감춰놓은 것들을 낱낱이 꺼내어 밝고 쨍한 언어의 빛으로 모조리 비추고 싶기도 했다. 진실로, 언젠가는 나의 삶 그대로를 글로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 p.12~13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 나에게는 이것이 글을 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나는 그 자유를 확인받기 위해 책을 읽고, 나처럼 책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글을 쓴다. 한편으론 좋아하는 마음을 말할 수 없어 다른 것으로 빗대어 말하고, 말할 수 없다며 숨어버린 시간들이 내가 소설을 읽고 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펼치고 싶다. 그리 대단한 취향이 아닐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해나가고 싶다.
--- p.39~40
예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아니어도, 계절과 색을 점유한 위대한 창작품이 아니어도, 나를 둘러싼 세계에는 반드시 사랑스러운 것이 있기 마련이다. 돋보이는 개성보다 그 개성을 도드라져 보이게 해주는 배경이 때론 더 귀하게 다가온다. 이 글의 제목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선반에 놓인 과자 봉지를 봤을 때처럼. 반쯤 먹은 과자 봉지를 빨래집게로 집어놓은 온점의 습관처럼. 나는 그 빨래집게 같은 글을 쓰고 싶다.
--- p.194~195
잘 쓰고 싶은 욕망과 현실의 차이가 커서 그 수렁에 빠질까봐, 옥수수빵과 커피의 맛을 사소하게 여길까봐, 내 곁에 있는 온점을 보지 못할까봐, 내 중심, 나의 첫 번째,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로 세우고 싶었다. 글쓰기나 소설가로 사는 삶은 그다음이라고, 글을 쓰지 않더라도 내 직업이 무엇이든 그 토대를 무너뜨리지는 말자고, 마음속 다짐을 새겨두고 싶었다.
--- p.304~305
어떤 기대나 포부를 담는 대신 그런 기대를 내려놓는 가벼움으로, 명사보다는 동사로, 문지르고 비비는 접촉으로, 긴장이 풀린 휴식, 몸과 몸이 닿았을 때 저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으로, 내가 뿌리내릴 수 있는 땅과 뻗어가고 싶은 하늘을 이름에 담고 싶었다. 내가 느끼는 충만한 순간을 글로 쓸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세상에 내어 보일 수 있는 내 안의 사랑이니까. 내가 받은 선물이니까. 괜찮아, 멜라져도 돼. 그렇게 편한 얼굴로 말하고 싶었다. 부디 그 이름이 세상에서 마음껏 멜라지기를 바라며.
--- p.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