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도 손에 만져지지도 않지만, 내가 아는 사랑은 이런 것.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잘 자라고 이불을 덮어주는 마음. 짙은 어둠도 이불처럼 같이 덮자는 위로와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기도 같은 것. 나도 가족들 곁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이런 마음으로 쓰고 엮은 글들이 여기 담겨 있다.
--- p.7
“어린것들은 손이 필요해. 살살 돌봐줘야 해.” 우리 넷 쪼그려 앉아 머릴 맞대고 고양이 한 마리씩 붙잡고, 녀석들 밥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해 질 무렵, 햇볕과 생기를 잘 머금은 공기와 파마약 냄새, 살구색 노을빛에 보송보송한 고양이 털이 빛났다. 손바닥에, 동동동 뛰는 여린 박동과 옅은 파마약 냄새 밴 수건 같은 살결과 흰 고양이 털이 남았다. 어딜 가든 잘 지내. 아이들과 인사하고 돌아서던 저녁이 있었다.
--- p.23~24
가끔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본다. 큼직하고 말끔한 동생의 신발, 발등은 반듯하고 안창이 움푹해서 믿음직스럽다. 종종걸음이 몸에 밴 엄마의 신발, 뒤축은 구겨지고 밑창이 자주 닳아 안쓰럽다. 또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신발을 오래도록 바라볼 때가 있다. 사는 게 팍팍하다 해도 잘 살아보고 싶어서 발 아프게 열심히 일하던 걸음들. 생의 뒤편에서 뒤꿈치에 반창고를 붙이고 종아리를 주무르던 예전의 내가 지나가는 사람마다 겹쳐 보인다. 전철에서, 터미널에서, 시장에서, 쇼핑몰에서, 웨딩홀에서, 거리에서 가만 바라보고 있자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오래 걸어보기 전에는 판단하지 말라’던 경구가 가슴 아프게 찌른다. 우리는 저마다 생의 무게를 버티며 걷고 있구나. 누군가의 뒤꿈치에서 문득 그 사정을 알아채는 순간이 있기에.
--- p.62
돌아오는 버스에선 모두가 잠들었다. 교회에 도착해 애써 잠을 이기며 놀다가 새벽 예배를 드렸다. 너무 졸려서였을까 아니면 아예 잠들어버렸나. 다음 날 밝은 크리스마스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노래를 부르던 밤의 기억만이 선명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을 때마다 그 밤이 떠오른다. 훗날 어른이 되고 알 수 있었다. 한밤중에 찾아온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얼마나 귀한 선물이었을지. 저물어가는 겨울에 혼자인 사람을 생각한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혼자인 사람에게 똑똑, 문을 두드리고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노래가 끝나면 우리 유가사탕을 나눠 먹을까요. 다디단 하얀 사탕을 나란히 오물거리면서, 동그랗게 마주 웃으면서. 그만큼의 마음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이 겨울은 따뜻할 텐데요.
--- p.78
“있지. 그때는 내가 너무 가난하니까 그걸 어떻게든 갖고 있어야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그걸 꼬매고 꼬매서, 우리 엄마 꺼를 차마 못 버리겠는 그런 마음이 있는 거야. 수리야, 너랑 나랑 자라면서 울 엄마가 덮어주던 거를. 엄마가 너무 보고 싶고. 엄마 냄새 남겨놓고 싶고. 눈물 폭 쏟아지는 소중함이. 아꼬와 죽겠지.” 암, 나도 알지. 나도 그런 게 너무 소중해 엄마. 할머니가 쓰던 솜이불 하나 버리지 못하고 기우고 덧댄, 엄마의 미련스럽도록 아까운 애정과 너무 넘쳐서 못 버리는 다정 같은 것들. 그런 거 전부다.
--- p.88~89
차글차글 차그르르. 이모가 준 가재미를 꺼내 구울 때마다 뭉클 일렁였던 이모의 마음이 와닿아 차그르르 파도친다. 아이들 낳아 먹이고 돌보고 안아볼수록 파도치는 마음이 먹먹해진다. 뭉근히 잘 데워진 마음 한구석에 서글픈 한기가 스밀 때면 내가 자라온 시간을 돌아본다. 그럼 어김없이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이 해사하게 웃으며 울고 있다. 생의 저녁 무렵, 저문 세월을 아기처럼 등에 업고서, 나를 사랑하는 얼굴들이 자글자글 웃으며 울고 있다. 할머니가 그랬고 엄마와 이모가 그랬듯이, 나도 늙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다만 늙어갈수록 잘 웃고 잘 울고, 저물어갈수록 품에 푸르고 짠 바다를 껴안은 할머니가 될 것이다. 그래. 나는 영영 예쁠 거야. 나를 키운 엄마들처럼 시간과 사랑을 이고 지고 자그마해지고 다정해져서 영영 예쁠 거라고. 가재미를 구울 때마다 훌쩍거린다.
--- p.119~120
무심코 엄마는 이게 좋아, 말하면 기억해두었다가 엄마는 이걸 좋아하지?라고 되묻는다. 엄마는 커피를 좋아하지. 엄마는 책을 좋아하지. 엄마는 달님을 좋아하지. 엄마는 서안이 지안이랑 손잡고 걷는 걸 좋아하지. 이런 말들. 늘 쓰던 머리핀이 바뀐 것도, 늘 신던 신발이 바뀐 것도, 새로 산 옷을 입은 것도 바로 알아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갑자기 툭, 엄마 좋아해. 엄마 사랑해. 사랑을 말로 한다. 아이들은 정말로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나를 살피고 좋아할 수 있나. 나는 요즘 작은 두 사람에게 받는 사랑이 벅차게 행복해서, 이 사랑을 자랑하고 싶어진다. 훗날, 이 사랑의 기억들로 남은 생을 살겠지.
--- p.161~162
나에게도 넌 좋은 사람인걸, 친구에게 말해주려다 깨달았다. 나는 이미 좋은 사람을 찾았구나. 우산 하나에 어깨를 기대고 마음까지 나누는 사람이 여기 있었다. 우리는 왜 되려고만 애썼을까 이미 곁에 있었는데. 이다지도 자연스럽게. 삶에 필요한 사람은 하나여도 괜찮다. 같이 우산 나눠 쓸 사람 하나. 문득 전화 걸고픈 사람 하나. 긴 편지 보내고픈 사람 하나. 따뜻한 식사 나눌 사람 하나. 닮고 싶은 사람 하나. 나다운 나 하나. 그런 사람들 하나씩 하나씩 찾아내는 게 내 삶을 꾸리는 일이더라고. 한 사람과 마주 웃으며 대화하는 이제는 안다. 내가 살고 싶은 방식은 ‘좋은 사람 되기’가 아니라 ‘좋은 사람 찾기’였다는 걸.
--- p.217
긴긴밤이 지나면 어김없이 아침이 밝아오고 다가오고, 돌아온다. 매일의 아침은 그저 다가오는 것뿐 아니라 다시 돌아오는 거라고 믿는다.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걸음의 수고로움과 고마움, 마주치고 다시 마주 보던 눈길의 새로움과 신비로움. 사는 동안 만나본 사람들이 나에게 가르쳐준 희망의 속성이었다.
--- p.256~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