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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고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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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고백들

이혜미 | 창비 | 2022년 03월 1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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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3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220쪽 | 264g | 118*188*11mm
ISBN13 9788936479046
ISBN10 8936479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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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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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건이 있다.
손안에서 함부로 뭉개지는 작정들이 있다.
이 단단한 열매의 예감과 근심, 시름과 실망을 돌보는 일에는 꽤 많은 마음 품이 필요하다. 웅크린 갑각류의 동물처럼 견고한 몸. 조용한 기다림 속에서 무르익는 결심에 대해 생각한다. 공간의 방향을 가늠하듯이. 어제의 향방을 짐작하듯이. 손끝을 세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색을 헤아린다. 이 비밀스러운 세계 속으로 입장하기 위해서는 사려 깊은 매만짐이 요구된다.
아보카도의 입구를 열어 그 안에 잠들어 있던 눈빛을 만나는 일은 빠르게 달아나는 어제 속에서 빛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다.
--- 「부드럽게 무르익은 눈빛을 만나러」 중에서

슬픔에 빠져 주위가 암담할 때 당근을 생각한다. 자신이 화려한 색을 지닌 것도 모른 채 땅속에 잠겨 있는 형광빛의 근채류 식물. 어쩌면 우리가 보는 세계가 이토록 캄캄한 것은 마음 주위를 자전하는 빛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휘황과 광채는 도리어 주위의 캄캄함을 일깨우기에. 그렇게 생각하면 우주로부터 지구로 파견 나온 스파이가 된 것 같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세계의 비애 속에서 주홍 단검을 손에 쥐고 드리워진 우울을 가르며 가야지. 당근이 깊이를 알 수 없이 두려운 땅 속에서도 은밀하게 자신의 빛을 지키는 것처럼.
--- 「주홍 단검을 들고 어둠을 헤치며」 중에서

짓물렀다는 건 너무 길게 머물렀다는 뜻일까, 눈가가 짓무를 만큼 울었다는 건 그만큼 슬픔을 지속했다는 뜻이므로. 가야 할 때가 지나서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눈치 없는 손님처럼. 혹은 애써 붙들어둔 사랑이 고이고 머물다 점차 눈빛을 잃어가듯이. 지나치게 오래 곁을 내어준 시간이 욕창처럼 시들어 썩어간다. 무너지는 중인 것. 오래 껴안아 짓무르고 만 것. 피워내지 못하고 안으로 영글어 맴도는 상념들. 말하자면 여름이 데려와 풀어놓은 무책임을 사랑하여 속모를 검정 봉지 같은 마음이 매번 흥건해져 흘러간다. 어쩔 도리 없이 물러버린 여름의 눈가들에게로.
--- 「여름의 무른 눈가들」 중에서

라자냐는 지층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전 과학시간에 만났던 빨강과 검정, 노랑과 파랑, 초록과 보라가 차곡차곡 포개져 있던 고무찰흙과도 같은. 그것들을 겹쳐 손아귀에 힘을 주며 뒤틀어지는 지구의 내부를 만들었다. 정합과 부정합. 땅 밑에 어떻게 그처럼 거대한 손이 있어 지층을 누르고 밀고 뒤흔드는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어떻게 그처럼 화려한 색깔들이 검고 칙칙한 이 흙 밑에 존재할 수 있는지를. 어긋난 단층을 만들기 위해 색색의 반죽을 칼로 자르면 나타나던 아름답고 기이한 무늬. 그것을 지구의 단면이라 배웠다. 겹겹으로 쌓인 지층은 지구의 일부답게 짙은 석유 냄새를 풍겼다. 그때 나는 세상을 생일 케이크처럼 조각내고 웃던 작은 신이었다.
--- 「라자냐의 갈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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