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집을 나와 도쿄로 간 건 시오리의 인생에서 가장 파격적인 ‘도망’이었다.
시오리는 기후현 다지미시의 그저 그런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다. 집은 좁은 상자 그 자체였다. 어린 시절에는 아무런 제약 없이 자랐지만 부모가 남동생을 낳을 수 없다는 게 기정사실이 되면서 감당하기 힘든 의무를 떠안게 되었다. 고바야시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덤으로 데릴사위를 들여 토지와 집안을 지키면서 대를 이을 후손을 낳아야 한다는 책임이 부과되었다.
부모는 시오리에게 가문의 후계자는 피아노, 다도, 서예, 영어 회화를 두루 배워야 한다면서 가정교사를 붙여 주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노는 건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고바야시 가문을 대표하려면 훌륭한 인품과 교양을 겸비해야 하기에.
시오리는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건 바보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뼈대 있는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달랑 대를 이어 지켜온 집이 한 채 있을 뿐 그다지 명문가도 아니었고, 내세울 만한 족적이 있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평범한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주부였다.
어느 누가 이 보잘것없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집 안에 틀어박힐 수 있겠는가?
--- pp.12~13
이치카와 히로유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스케가 『레테』를 설립한 계기가 되었던 말이었다.
‘고스케 씨는 선한 의지가 강한 분입니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돕는 데 가장 이상적인 분이지요.’
고스케는 어린 시절부터 착한 아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친구가 장난감을 빌려달라고 하면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빌려주었고, 두 살 위 누나가 그의 손 안에 있는 젤리를 달라고 할 때도 지체 없이 건네주었다. 친구에게 빌려준 장난감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젤리를 먹지 못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훨씬 더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고스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너무 착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6명이 해야 하는 화장실 청소를 혼자서 하다가 학생주임에게 발각되었다. 아이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한 건 아니었고, 모두들 화장실 청소를 싫어해 그냥 혼자 했던 것뿐이었다. 고스케는 한사코 좋아서 한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부모는 학교를 찾아가 부당한 처사라며 따지고 들었다. 그 결과 다른 아이들의 부모가 학교로 찾아와 사과하는 불상사가 빚어졌다. 고스케는 그때 아무리 선한 의도로 한 일이라도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 pp.40~41
구루미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발등을 커터로 그었다. 발등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모습을 찍어 트위터에 올린 적도 있었다. 물론 10초 만에 실수라는 걸 깨닫고 사진을 내렸다. 만약 그대로 놓아두었더라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구루미는 트위터를 나와 인스타에 접속했다. 케이크바이킹의 쇼트케이크, 선샤인수족관의 펭귄, 호텔 미라코스터에서 미키의 귀를 붙이고 얼굴을 애플리케이션으로 장식한 여자아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독특하고 매력적인 사진들이 저마다 반짝이는 빛을 발하며 ‘좋아요’를 눌러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구루미는 ‘좋아요’를 누르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자신만만하게 사진을 찍어 올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구루미는 재수생이라 대학생 친구들이 올린 사진을 보면 홀로 동떨어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울적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수학 참고서를 펼쳤다. 수학 과목은 수학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 있어서 좋았다. 허수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숫자인데 수학에서는 있다고 가정하고 계산하는 게 흥미로웠다.
--- pp.89~90
“VR 영상이나 사운드를 만들어내려면 고도의 기술을 가진 전문가가 필요해. 현재 일본에서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은 지극히 한정적이야.”
“이 세 사람이 유력 후보들인가?”
A4 용지에 가메자키 요시카즈, 이데이 미키오, 데라사와 가호라는 이름과 각자의 이력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혼자서 VR 게임을 만든 적이 있는 프리랜서들이야.”
“혼자서 VR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이 세 사람밖에 없어?”
“VR 게임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영역이야. 게임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시간적 여유가 없을 테니까 탈락시켰어. 이 세 사람은 VR 게임을 만든 전례가 있고,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프리랜서들이야. 지난 2년 동안 이들이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아무도 몰라. 이 세 사람 가운데 하나가 VR 게임을 만들었을 공산이 커.”
옆에서 듣고 있던 니시노가 추의 말을 제지했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아.”
“어떤 의문이 남는다는 거야?”
“우선 VR 게임을 만든 동기가 뭔지 모르겠어.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게임이 왜 필요했을까? 그런 게임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 pp.113~114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자 실제로 나타났다. 고글을 사용해 생겨난 이 공간은 마치 허수가 도입된 숫자 같았다.
‘굉장해.’
오른쪽 왼쪽, 위아래 사방으로 어두운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어두운 공간을 향해 빛의 화살이 날아갔고, 가까운 것은 빠르게, 먼 것은 느리게 물리 법칙을 따라 중층적으로 움직였다. 구루미는 흘러넘치는 색깔을 가르며 앞으로 날아갔다.
컬러풀한 빛이 반딧불처럼 주변에 떠있었고, 눈앞에 은색으로 칠한 직사각형 문이 나타났다.
“문을 열어보세요.”
구루미는 집게손가락으로 트리거를 당겼다. 그 순간 문에서 은색의 빛이 흘러넘쳤다. 눈이 부시도록 흘러넘치는 은빛이 시야 전체를 가득 채워갔다.
은빛이 서서히 사라졌고, 구루미는 어느새 거리에 다다라있었다. 돌로 바닥을 깐 도로 양옆으로 목조 주택들과 침엽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집은 다양한 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방금 전 공간을 수놓았던 빛이 집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었다. 은색의 눈도 살짝 쌓여 있었다. 은색이 다양한 색깔들을 조화롭게 만들어 주었다.
구루미는 화려한 색들과 자제력을 가미한 은색의 조화가 전하는 아름다움에 자기도 모르게 매료되었다.
--- pp.122~123
추는 쇼핑몰 출구로 걸어갔다. 쇼핑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중대한 결단을 내린 자신을 축복해주는 듯했다. 추는 계속 출구로 걸어가다가 장난감 매장 근처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다음 주에 롤플레잉 게임 신작이 발매된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죽으면 더는 게임을 할 수 없겠지?’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죽으면 다 끝장인데 게임을 할 수 없게 된 걸 한탄하다니?’
추는 새삼 자신이 게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그 당시는 메가 드라이브나 슈퍼 패미컴이 출시되어 한껏 관심을 집중시키던 때였다. 추는 본격적으로 게임에 빠져들었고, 왕따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게임이 없었다면 난 이미 죽었을 거야.”
중학교 시절에는 교칙이 엄격한 학교를 다녔기에 친구는 없었지만 왕따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때부터 추는 게임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꿈을 품게 되었다.
‘언젠가는 내가 만든 게임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거야.’
추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게임이 나를 구해 주었어. 게임을 살인에 이용하는 자가 있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마 아리모리도 나와 같은 심정일 거야. 넌 집단 자살에 대한 우려 때문에 조사에 나섰겠지만 나는 게임을 살인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자를 찾아내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들었어.”
“부디 자살 게임이 존재하지 않길 바랄 수밖에.”
“나도 차라리 헛다리를 짚은 것이었으면 좋겠어.”
어린 시절부터 게임에 미쳤던 추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러길 바라.”
--- pp.140~141
고글을 쓰자 빛의 공간으로 빨려 들었다. 구루미는 다양한 색깔로 이루어진 빛의 공간을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은빛 나라』를 알게 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기분 좋은 음악과 다양한 색깔의 빛에 감싸여 지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몸이 녹아내릴 듯 쾌감을 느꼈다. 오늘은 『은빛 나라』에 폭설이 내렸다. 두터운 먹구름이 하얀 눈을 하염없이 흩뿌렸다. 『은빛 나라』에 들어올 때마다 매번 날씨가 달랐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 탓에 뿌옇게 흐려진 시선 속에 다운점퍼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비둘기’라는 이름이 머리 위에 표시되어 있었다. 『은빛 나라』에서 구루미의 이름은 ‘넛츠’였다. ‘안녕하세요?’라는 뜻의 이모티콘을 날리자 ‘비둘기’가 즉시 화답해 주었다.
『은빛 나라』에서는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잡초를 뽑거나 눈을 쓸거나 길을 청소하면 보수를 받을 수 있었고, 그 돈으로 다양한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었다.
--- pp.145~146
지난 사흘 동안 시오리는 고글을 뒤집어쓰고 지냈다. 시오리는 난생처음 VR을 대하고 깜짝 놀랐다. 분명 VR이었지만 실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고글을 머리에 쓰는 순간 눈 덮인 거리가 나타났다.
오노가 말했다.
“너의 눈앞에 펼쳐진 곳이 바로 『은빛 나라』야. 나는 홋카이도의 구시로 출생이야. 홋카이도 눈은 도쿄의 눈과 확연히 달라. 화이트아웃이 일어나면 주변 풍경과 사물들이 온통 하얗게 변하면서 눈부신 빛을 반사하지. 마치 누군가 눈가루를 뿌리는 것 같아. 내 고향 홋카이도의 눈 내리는 날을 참고로 해서 만든 거리야.”
홋카이도가 고향이라고? 전에는 규슈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오노의 말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규칙이었다.
“이 VR을 당신이 만들었어요?”
“당연하지.”
“대단하시네요.”
절대로 아부의 말이 아니었다. VR이 이렇게 대단한 줄 미처 몰랐다. 눈을 호사시키는 경치, 다양한 나무와 각종 식물들, 넓게 펼쳐진 바다, 하얀 눈꽃을 뿌리는 하늘이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 pp.214~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