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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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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꽃

: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니들의 끝나지 않은 미술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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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7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406g | 145*190*20mm
ISBN13 9791160801477
ISBN10 116080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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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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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밝은 할머니들의 첫인상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때까지 나는 상처가 깊은 사람은 항상 우울할거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본군 성노예라는 참혹한 일을 겪은 분들이라면 더욱더 그럴 거라고 상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고민의 깊이는 할머니들의 안타까운 삶에 대해 고작 며칠 생각한 것이 전부였다. 활자를 통해 접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삶을 혼자서 추측하며 마음껏 할머니들을 동정하고 염려했던 것이다. (중략) 나는 어정쩡한 태도로 나도 모르게 할머니들을 살피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아마도 처음 신문에서 본 김학순 할머니의 눈빛 같은 강렬한 무언가를 찾았던 것 같다. 하지만 할머니들의 모습은 김학순 할머니와는 사뭇 달랐다. 과거의 상처는 어딘가에 꽁꽁 숨겨놓은 듯, 평온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할머니들로 보였다.
--- [눈빛](18~19쪽) 중에서

“이 나이에 뭔 그림이여.” “늙어서 낼모레면 죽을 판에 이기 무슨 호사고.”
“치아라~ 머리 아프다.”
(중략) 나는 할머니들 앞에 놓인 미술용품을 보며 할머니들과 그림이라는 낯선 만남에 다시 한 번 신선한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나와 달리, 할머니들의 표정은 창밖의 새침한 봄 날씨를 더 닮아 있었다. 미술용품을 받아든 할머니들은 처음 갖게 된 물건에 대한 기쁨이나 호기심보다는 탐탁지 않은 마음을 감추지 않고 얼굴 표정에 드러냈다. 한마디로 모두 시큰둥했다.
--- [떨리는 손](25~26쪽) 중에서

오랜만에 대구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올라오셨다. 멋쟁이 할머니답게 고운 차림 이었다. 할머니는 서울 나눔의 집에 올 때마다 미술 수업에 참여했다. 마침 심상 표현을 해보는 첫날이었다. (중략) (이용수 할머니는) 무엇이 생각났는지, 무지개 색 타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면 왼쪽에 조금 작은 타원이, 오른쪽에는 조금 큰 타원이 그려졌다. 할머니는 붉은색 물감을 묻힌 붓으로 오른쪽 타원 위를 힘주어 꾹꾹꾹 찍었다. 다른 할머니들은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이 할머니가 붉은 점을 격하게 찍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왼쪽 타원 위에 ‘청춘’이라고 쓰고 그림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듯 눈을 감았다 뜨더니, 그림 설명을 덧붙였다. “왼쪽은 처녀 시절 내 깨끗한 모습이야. 어릴 적엔 참 곱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 이 오른쪽은 지금의 나인데, 상처를 많이 입었어.”
--- [붉은 입술](73~75쪽) 중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다룬 화가들의 그림에 관해 강덕경 할머니와 이야기 하고 두 주쯤 지났을 때였다. 수업 준비를 하는데, 강 할머니가 조그만 스케치북을 들고 머뭇거렸다. 할머니 눈에 쑥스러운 빛이 스쳤다. “미술 선생, 나 이런 것 그려보고 싶어지데?” 그림을 보는 순간 헉 하고 숨이 멎고 감동이 밀려왔다. 할머니의 인생이 꼬여버린 시작점을 표현한 그림이었다. 강 할머니가 드디어 용기를 내어 꽁꽁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스케치를 보고 나니, 나는 할머니의 이 중요한 그림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겨놓고 싶었다. 그래서 캔버스에 옮겨 그리기로 했다. (중략) 정성 들여 만든 순결하고 깨끗한 캔버스. 강 할머니는 그 앞에 마주 섰다. 아니, 열여섯살 때 일본인 선생의 권유를 거부할 수 없어 큰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넜던 그때, 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하루 종일 비행기 공장에서 노동에 시달리며 어머니가 보고 싶어 울던 그때, 밥 세 숟가락과 된장국, 콩떡 세 개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가 탈출을 시도했던 그때, 얼마 못 가 붙잡혀 발가벗겨진 그때, 그 언덕 앞에 마주 섰다.
--- [빤스 하나 입히라](138~138쪽) 중에서

“할머니,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미술 선생, 내가 일본군을 이렇게 쭈욱 그려야 되겠는데…….”
손으로 허공에 일자를 그으며 다짜고짜 일본군을 그리겠다는 김순덕 할머니의 이야기에, 그제야 할머니의 급한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 할머니의 그림 〈빼앗긴 순정〉은 같은 상처를 가진 할머니들에게 큰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김 할머니에게는 더욱 큰 자극이 된 것이 분명했다. (중략)〈그때 그곳에서〉는 김 할머니가 처음 스스로 그려낸 자신의 이야기이자 가해자인 일본군을 표현한 첫 그림이었다. 또 그때의 악몽이 평생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그림이기도 했다. 그것은 평소 선한 얼굴에 그늘 없이 밝은 김 할머니에게도 예외 없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그림으로 영원히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그림을 기점으로김 할머니도 기억의 퍼즐을 맞추듯 과거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 [그때 그곳에서](160, 166~167쪽) 중에서

미술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김 할머니가 수업 준비는 안 하고 장롱을 뒤적거리더니 곱게 꽃을 수놓은 천 여러 장을 꺼내놓았다.
“미술 선생, 이것 좀 봐.”
(중략)
“이 꽃들 고운 것 좀 봐! 이것으로 뭘 할 수 있을까?”
한동안 자수를 뒤적이며 아까워하는 할머니를 보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할머니, 이 자수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려볼까요?”
“수에다 그림을?”
“어떤 자수가 제일 마음에 드세요?”
김 할머니는 한참을 뒤적이더니, 탐스러운 목련꽃 자수를 집어들었다.
“여기 봉오리를 터뜨리기 전 목련꽃이 꼭 내 신세 같네. 제일 이쁠 적에 제대로 한번 피어보지도 못한 것이 나랑 닮았어.”
--- [잡동사니](195~197쪽) 중에서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고통과 슬픔을 그림으로 하나하나 완성할 때마다 자신감과 성취감도 그만큼 쌓여갔다. 자연스레 그림은 할머니들에게 삶의 목적이자 살아가는 한 방편이 되었다. 할머니들에게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라는 역할 외에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승화시키는 화가라는 새로운 역할이 생긴 것이다. 또한 할머니들은 그림 전시를 통해 변하고 있었다.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할머니들을 조금씩 바꿔놓았다. 할머니들이 과거의 상처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증언할 때와 그림으로 보여줄 때의 모습이 사뭇 달랐다. 그림에 대한 질문에 간간이 미소 지으며 자신 있게 답하는 모습에서 증언에서는 볼 수 없던 자존감이 엿보였다. 할머니들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은 일이 생긴 것이다. 특히 일본에서 열린 전시회는 요즘 할머니들이 그 누구보다 멋진 삶을 살고 있음을 관객들에게 증명하는 장이 되었다.
--- [전시회](266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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