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이 엄마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편안해 보이지 않는 것이 엄마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이가 보이는 특성이 엄마의 양육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스마트폰에 담겨 있는, 집에서의 다정이 모습은 매우 밝아 보였고, 말도 유창하게 잘하고 동생과 놀아주는 모습은 의젓하기까지 했다. 나는 다정이 엄마에게 “어머님 때문에 다정이가 유치원에서 불편해하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말로 안심시켰다. 아이의 기질은 타고나는 것이다. 엄마의 품을 벗어나서 세상과 만나면서 드러나고, 이를 엄마가 알게 되는 것이다. 아이의 모습, 취향, 습관, 반응들을 엄마가 미리 알고 대비할 수는 없다. 다정이는 놀이치료를 시작했고, 초기 3~4회기에는 매우 긴장하고 부자연스러웠지만 치료실 내부를 찬찬히 탐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회기에서는 안전을 확인하고 주도적으로 놀이를 진행해나갔다.
--- p.26
엄마는 아들을 붙잡고 한국이 얼마나 경쟁이 치열하고, 좋은 대학, 직업이 없으면 살아나가기 힘든지를 설명하려다가 불현듯 친정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는 중고등학교 시절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지만 친정 엄마에게는 늘 잔소리를 들었다. 친정엄마가 세상이 얼마나 위험하고 조심할 것이 많은지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하며 자신을 답답하게 했던 때가 생각났다. 사춘기 시절에는 친정 엄마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나고 밉기도 했지만 어느 사이 자신도 미래를 걱정하고 새로운 일에 대한 시도를 포기하고 있었다. 친정 엄마가 알려준 것을 조심하면 위험한 일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만 같다. 그때는 안정되어 있지만 심심하고 따분해 보이는 친정 엄마의 모습이 싫었는데, 내가 아들에게 말하는 것도 위험한 세상을 조심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뿐이었다.
--- p.37
책을 통해 배운 보편적인 지식을 내 아이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일이 잘 안 됐다. 몇 시간마다 배가 고파지는지, 기저귀가 젖어 불편하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리고 졸릴때 어떻게 안아줘야 하는지는 아이와 계속 붙어 있으면서 알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남편이 뭘 하는지, 내 옷차림이 어떤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할 때를 대비했다. 엄마는 아이를 알아가면서 스스로 엄마 역할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자신을 신뢰하게 된다. 자신이 아이를 가장 잘 알고 있고,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엄마 역할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아이는 바깥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온전히 엄마에게 의존하는 상태이며, 이 시기에 엄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어린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 풀타임 직업이고 위대한 일인가 하는 것을 엄마와 주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 p.45
딸이 하나하나 확인받으려고 해서 귀찮았는데, 이제는 엄마가 딸에게 무언가 조언을 하려고 하면 아이 얼굴이 굳어지니 당황스럽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까르르 웃으면서 말도 많이 하는데 엄마에게 속마음을 말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약간의 배신감이 느껴졌다. 1년 전만 해도 딸을 챙겨줘야 하는 시기가 빨리 지나가서 모든 일을 스스로 하기를 바랐다. 엄마는 아이에게 신경 쓰는 일이 줄어들면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 즐기려 했다. 이상하게도 딸이 바랐던 방향으로 변하는데, 엄마는 왜 마음이 편하지 않은 걸까? 아이에게 집중했던 에너지를 엄마 자신에게 돌려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해도 쉽지는 않았다. 아이에게만 몰입했던 기간이 수년간 이어지니 이제 와서 엄마 자신의 욕구를 알아내는 것이 낯설었다. 이런 생각까지 드니 그동안 아이에게 몰입했던 시간들이 덧없이 느껴졌다. 심란한 마음이 들고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딸이 엄마에게 다가와 안기며 투정을 부렸다.
--- p.65~66
엄마는 아이가 ‘속상함, 슬픔, 미움, 화가 남, 우울함, 불행함, 두려움, 불안’과 같은 감정을 되도록 겪지 않고 지내길 바란다. 아이의 감정 상태가 대체로 ‘즐거움, 기쁨, 행복함, 편안함’에 속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바람으로 아이에게 감정을 물어보면 아이는 편안히 대답하지 못한다. 두렵고 힘든 감정을 표현했을 때 엄마가 과하게 걱정하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는 이러한 감정을 감춰야 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아이가 감정을 표현했을 때 엄마가 기뻐하거나 즐거운 반응을 보이면 아이는 그 표현을 반복해서 시도한다. 아이가 다양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바란다면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했을 때도 담담히 받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면서 커가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모르다가 엄마와 주변의 반응을 통해서 알게 된다.
--- p.90~91
초등학교 3학년인 보통이 엄마는 요즘 ‘나는 좋은 엄마인가?’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답답한 마음에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럼, 좋은 엄마지!”라는 답을 듣는다. 보통이에게 크게 화를 내거나 혼내본 적이 없고 웬만하면 아이의 말을 귀담아 듣고 반응하는 편이지만 ‘내가 엄마로서 잘하고 있나?’라는 고민은 늘 계속된다. 무엇이든지 알아서 잘하는 첫째와 달리 둘째 보통이는 낯가림도 많고 내성적인 아이다. 담임선생님은 보통이가 수학에 재능이 있고 모범적으로 지낸다고 하지만 엄마 앞에서의 보통이는 “시험보는 거 스트레스 받아”라며 풀죽은 모습이다. 주위 엄마들은 보통이가 순하고 착하다며 부러워하지만 엄마는 보통이가 혼자 있기 힘들어하고 조금만 지적을 해도 울먹이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보통이 엄마는 TV에서 소아기 우울증상에 관한 내용을 본 뒤 아이에 대해서 행여나 놓치는 것이 있을까봐 상담실을 찾았다. 보통이에게 자신이 좋은 엄마인지가 궁금했다.
--- p.105~106
엄마가 아이의 삶에 애정으로 관여하며 아이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내는 것은 초등학교 기간 안에 끝내는 것이 이상적이다. 아이가 커나가면서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영역의 한계를 깨닫고, 한 발짝 물러서주는 것이 오히려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 아이에게는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판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 아이의 내적 성장을 위한 초석은 엄마도 자신의 삶을 관찰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내면의 중심에 아이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엄마 스스로 추구하는 삶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방법을 차근차근 찾아나가야 한다. 아이의 눈에 자신의 성공 여부가 엄마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줘야 한다. 아이는 엄마의 주체적인 삶을 보며 자기 삶에서 현실과 타협하는 것을 배워나간다. 나무가 촘촘히 서로 가까이 얽혀 있으면 마찰에 의해 오히려 불이 난다. 엄마와 아이는 한 숲에 있는 각자의 나무와 같다.
--- p.126~127
도희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두려움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친구에게 늘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애쓰다 보니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고 이를 표현하는 것이 서툴렀다. 또래 집단으로부터 배척을 받으며 느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퇴를 하려는 것이었다. 불편한 감정이 들 때는 이를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 잘 다루어 견뎌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돕기 위해서는 부모와의 소통이 중요하다. 하지만 엄마도 도희가 자퇴라는 말을 꺼냈을 때의 감정을 아직 추스르지 못한 상태였다. 엄마는 아이에 대한 실망감, 분노 그리고 주변 시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엄마가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다룰 줄 알아야 아이와 원만히 대화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희와 부모님 모두 중용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도희는 자퇴를 고집하지만 부모는 자퇴를 반대하고 있는데, 이때 서로의 입장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도희가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 p.134~135
“나는 늘 주변 사람들 눈치를 봐.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려워.” “중학교까지는 성적이 괜찮았는데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점수가 떨어져. 앞으로 스트레스를 더 받을 텐데 나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다른 애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나만 나약한 것 같아.” “이제 곧 중간고사인데 노력은 하지 않고 불안해하기만 하는 내가 너무 싫어. 그런 생각이 들 때 자해를 하게 돼.” 정인이는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 내적으로 고통스러웠다. 아직은 감정을 다루는 법을 잘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있지만 주변에서 도와준다면 정인이는 힘든 감정을 견뎌내는 방법을 알아나갈 것이다. 이 과정을 돕기 위해 엄마가 먼저 다가가는 것이 좋다. 갈등이 생길 것을 염려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감정 표현도 못하고 사이만 멀어지게 된다. 정인이는 현재 자신의 감정을 혼란스러워하고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엄마가 차분한 태도로 대화를 시작해 감정을 안전하게 다룰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 p.141~142
세상에 부족함이 1%도 없는 엄마가 존재할까? 전문가들은 엄마가 자신의 양육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져야 된다고 말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여기며 아이 앞에서 당당할 것을 권한다. 상담을 하러 오는 엄마들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겨 도움을 받으러 오는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해 다양한 고민을 호소한다. “저와 남편은 퇴근하면 8시가 넘어요. 아이 얼굴 볼 시간이 많지 않아요. 일요일이라도 놀아줘야 하는데, 제가 너무 피곤해서 그러질 못해요. 다른 엄마들은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줄 텐데 제가 부족한 엄마인 것 같아요.” “아이가 자꾸 나가자고 하는데, 아이가 원하는 만큼을 못 해줘요. 저는 집에서 조용히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활발한 아이에게 제가 안 좋은 엄마일까요?” “잘해주다가도 욱해서 화를 내고 뒤늦게 후회를 해요. 제가 다혈질이라 다른 엄마보다 화내는 모습을 많이 보여줘요. 화를 내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괜찮은 건가요?”
--- p.173~174
엄마가 완벽한 방법으로 아이의 발달 단계를 이끌어나갈 수는 없다. 아이의 발달과 성장은 아이의 몫이다. 아이가 자신이 해내야 하는 숙제를 엄마에게 물어봤을 때 엄마가 정답이나 해결책을 바로 제시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성장중인 아이가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엄마가 이것을 다 채워주지 못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엄마가 안전하게 보살피다가 아이가 적응하는 정도를 보면서 조금씩 손을 떼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엄마의 부족함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이는 부분적인 것이다. 부족함이 있고 없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엄마가 자신의 부족함을 대하는 태도이다. 친구관계 문제로 힘들어하는 아이는 엄마가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면서도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알게 된다.
--- p.189~190
산후우울감이 배우자의 도움으로 해소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아 엄마의 우울한 정서가 심해지면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남편을 따라 낯선 도시로 이사를 온 뒤 출산을 하게 된 A씨는 마음이 울적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느라 밤에 깊이 못 자고, 아이가 열이 나거나 토하는 일이 있으면 병이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남편이나 소아과 의사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던 A씨는 아이에게 옷을 입히다가 몸에 상처를 내게 된 이후로 자신이 제대로 엄마 역할을 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한 자신 때문에 아이가 상처가 났다는 생각이 들면 울음이 터져나와 진정할 수가 없었다. A씨가 “이런 엄마면 없는 게 낫다. 죽고 싶다”라는 말을 하자 이를 심각하게 생각한 남편이 병원을 찾았다.
--- p.198~199
자기 방 정리나 물건 챙기기와 같은 것은 엄마가 다급해할 때가 아니라 아이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고 이를 고쳐나가려는 마음이 생길 때가 돼야 해결된다. 아이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 엄마가 반복적으로 말하고 다그쳐도 소용이 없다. 이 과정에서 엄마가 고통스러운 감정을 계속 아이에게 쏟아내는 것은 좋지 않다. 아이가 비난받지 않기 위해 엄마가 바라던 모습을 보여도, 엄마는 만족할지 모르나 아이는 스스로 해냈다는 유능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엄마의 말을 어기거나 실수를 하면 상황을 모면하고자 거짓말을 하기 쉽다. 발달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법을 모두 시도해보고 스스로 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믿고 기다리세요”라는 나의 말에 엄마들은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언제쯤 그렇게 될까요?”라고 되묻는다. 아이의 발달은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아이마다 변화하는 시점이 다르지만 아이는 삶 속에서 계속 성장한다.
--- p.219~220
대부분의 엄마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좋은 엄마라는 것 자체가 막연하고 주관적이기에 자신이 좋은 엄마가 되었다고 만족하기는 어렵다. 아이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엄마들 중 자신이 아이를 가장 잘 알고 있고 적절한 반응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양육 효능감’이 낮은 경우가 많다. 다양한 육아 정보를 찾아내고 관련 서적을 읽지만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기는 힘들어 자신은 좋은 엄마가 아니라고 느끼며 좌절한다. 부모가 되기 전 엄마는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좋은 사람, 완벽한 사람이 되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아이에게만큼은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환상을 가진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 감정을 나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이와 소소한 즐거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기에 막연한 환상 속의 좋은 엄마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엄마를 구분하자.
--- p.246
아이 앞에서 엄마로서 부족하다고 여길 때도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부족하다고 자책하는 경우도 있다. 주변 엄마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잘 관리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취미 활동과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엄마를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또한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고 감정 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한다. 직장생활을 하며 경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대인관계를 활발하게 하는 엄마를 보면 가족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는 엄마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그동안 아이, 가정에 몰입했던 자신의 노력이 초라해 보인다. 사람에게 주어진 에너지와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한 가지에 치중하면 나머지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외부 활동이 많은 엄마가 가정 내 생활에도 완벽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자.
--- p.255~256